2007년 01월 09일
서준식 '옥중서한 1971-1988' Note(77)
4 1982년 6월 8일 -1984년 5월 12일
1983년 6월 21일
영실아, 읽어 보아라.
'세월'이라는 것은 편리한 것일 수도 있다. 오랜 세월을 두고 밤낮 쉴 새 없이 흐르는 강물이 울퉁불퉁한 커다란 바위덩어리를 동그랗고 예쁜 조약돌로 다듬어 놓듯이, 때로 우리가 겪어야 하는 커다란 충격은, 그것이 세월의 흐름에 내맡겨짐으로써 우리가 보다 받아들이기 쉬운 크기와 형태로 나누어지고 다듬어지게 되기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5월 24일에 커다란 충격이 되어 나를 때려눕힌 이변호사와의 면회 내용을 너에게 보고하기에 앞서 그것을 한 달 동안 '세월의 흐름에 내맡겨' 보았다.
그날 이 변호사는 우선 우리 아버님이 돌아가신 데 대하여 나에게 정중히 조의를 표했고, 우리는 한두 가지 아버님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 후 곧 소송 이야기로 들어갔다. 이 변호사는 나에게 '준비서면'에 대한 의견을 말해 보라고 했다. 너에게 보낸 5월 14일자 편지에 썼듯이 나는 거기에 대하여 큰 불만이 없지만, 법률 문제에 대하여 좀더 학설적 근거를 동원해서 객관적으로 우리 주장을 설득력 있게 전재할 수도 있지 않았느냐는 취지로 의견을 말했다. 그러나 이 변호사는 마치 검사가 피의자를 추궁하는 것과 같은 기세로 나를 닦아세우기 시작했다. 잠시 어리벙벙하다가 나는 이 변호사가 무엇엔가 굉장히 화를 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입을 다물어 버렸다. 이제 사실상 소송이 종결된 단계에 와서 미주알고주알 따져 가며 다투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증인소환 문제도 이미 지나간 문제, 사상 문제에 대해서도 내가 자필 진술서를 제출한 이상, 거기에 정착되어 버린 나의 사상을 이 변호사가 어떤 식으로 해석하든 그런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지 않은가?
언젠가 너는 이 변호사가 나의 진술서를 높이 평가한다고 했지만 그것은 나에게 듣기 좋으라고 해 보는 거짓말이 아니었을까? 이 변호사는 진술서의 법률 문제 부분은 '체계도 없는 나열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비판했고(그것은 당초에 법원에 제출하려 했던 것이 아니다. 이 변호사가 연구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가능한한 많은 참고사항(학설인용)을 '나열'했던 것이라는 점을 이 변호사는 까맣게 잊고 있다!), 사상 부분은 '하나의 사상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유치하고 잘못된 것'이라고 혹평을 했다. 이 변호사는 진술서 중 '생산수단'운운 하는 부분을 가장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다. 그 부분만 없으면 '서준식은 아무런 주의자도 아니다'라는 주장이 가능해지고 이길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반드시 그렇게는 보지 않지만, 어쨌든 나로서는 그 부분을 없애 버릴 바에는 차라리 전향을 해 버리는 편이 더 시원스러운 해결책이라고 믿고 있다. 온갖 요령을 부리면서, 때로는 전향 이상으로 스스로의 영혼을 모독해 가면서까지 어찌 됐던 형식적 비전향만을 지켜 낸다는 자세는 근본적으로 경멸해야 할 동기에서 나온 것이기가 십상이다.
소송 이야기는 이것뿐이다. 이런 것은 조금도 '커다란 충격'일 수가 없다. 나는 소송 같은 것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는 것이다. 어떤 결과가 나든 그런 것은 조금도 나의 슬픔일 수 없다. 이 변호사가 그토록 울화통을 터트린 것은 물론 내가 '소송 수행에 간섭'을 하기 때문이지만, 그 '간섭'이란 것이 이 변호사에게 직접 간섭할 수 없는(즉, 자유의 몸이 아닌) 내가 편지에 써서 집에다 불만을 토로하면 그것이 '제3자'(그것도 일본인!)를 거쳐서 이 변호사에게 간섭이 가게 되는, 그런 순서로 이루어지기 때문임이 분명하다. 이 변호사는 무어니 무어니 해도 우리 나라의 일류변호사이다. 당연히 프라이드가 있고 또 그 프라이드에 값할 훌륭한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다. 마땅히 우리는 이 변호사를 그런 사람으로 대우해야 했다. 이 변호사의 프라이드를 손상시키는 일이 없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었다는 이야기다. 이 변호사가 불쾌한 것도 당연하다 하겠다.
이 변호사는 입을 다물고 있는 나에게 대성일갈, "자네는 그 교만을 버려! 이 세상에 자기 혼자만이 최고라는 자만심을 고치란 말이다!" 뜻밖의 말이다. 나 같이 못난 만성 자신상실증 환자가 도대체 어디서 교만의 냄새를 풍기는 것일까? 너도 너의 이 오라비가 교만하다고 느끼고 있는 것일까? 이 변호사는 대구에 가서 승 형을 만났을 때의 이야기를 했다. 이 변호사가 찾아가니 승 형은 그야말로 미칠 지경으로 기뻐 날뛰더라고 말이다. 형만한 동생이 없다는 우리나라 속담이 입증되기 위하여 승 형은 어디서나 나를 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만일 내가 형처럼 표정이 풍부하지 못해서 교만 냄새가 난다면 나로서는 얼마나 억울한 일인가!
여기까지만 해도 좋았다. 그러나 그 다음의 이 변호사 말은 나에게는 그야말로 청천벽력이었다. "자네들 재일동포들에게는 아주 못된 버릇이 있다. 그것은 일본에서 일본인들로부터 받은 멸시를 그대로 조국에 와서 조국의 동포들에게 되돌리려는 나쁜 버릇, 이것이 재일동포의 통폐다!" ...이 변호사는 끄떡없는 확신을 가지고 그렇게 단정했다. ... 그래서 나는 한번 스스로를 돌이켜 보겠다고 하고 또 입을 다물어 버릴 수밖에 없었다. 이쯤되고 보니 계속 이 변호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어도 나의 정신은 조금도 소송 이야기 쪽으로 가 있지 않았다. 나의 입을 봉해 버리려는 이 변호사의 '작전'이 주효했다고나 할까. 나의 참담한 심정이 얼굴에 보기 흉하게 번졌는지도 모른다. 이 변호사는 헤어질 때쯤 되어 여느 때의 인자한 표정과 말씨로 돌아가서 언성을 높이고 꾸짖었음을 사과하고, 이런 것도 모두 우리들의 신뢰관계와 유대를 공고히 하기 위한 것이니 섭섭히 생각하지 말라고 했다. 우리는 악수했다. 그리고 우리는 웃으며 헤어졌다.
웃으며 헤어짐으로써 유대는 공고해졌다. 그러나 거듭 말하겠다. "소송 같은 것은 아무래도 좋다!" 이 엄청난 아픔을 어이할 것인가? 그날 밤 나는 물론 수십 번 수백 번 몸을 뒤척이면서 뜬눈으로 지새웠다. 나에게 '재일동포의 통폐'가 있는 것일까? 있을 지도 모른다. 아, 있겠지, 아마도... 적어도 잠재적, 무의식적으로라도... 그렇다면 내가 '재일동포의 통폐'때문에 이 변호사의 방침에 반항했을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나는 일본인 변호사라면 어떤 식으로 소송을 해 나갈 것인지 모르고 있다. 법정으로부터 격리된 조건에서의 궁금하고 답답한 심정의 토로,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 어떠한 불이익을 입는 일이 있어도 '비굴해지지 말아야겠다.', '떳떳하게 고개를 쳐들고 살아가고 싶다.'는 거의 강박관념에 가까운 소망(그것은 12년 전에 그 참담했던 재판이 끝난 뒤부터 지금까지 줄곧 나의 '인간적 타락'을 막아 왔던 하나의 지주였다.) 이 때로는 도도하고 시건방지고 교만이라고도 할 수 있는 분위기가 되어 나의 몸을 휘감았다고 해도 그것은 '재일동포의 통폐'와는 별개의 것이 아닌가 말이다! 더군다나 아키후사 여사의 증인소환 반대는 따지고 보면 나의 사건에 일본인(그것이 어떠한 종류의 일본인일지라도!)이 직접 관여하는 데에 대한 거부, 그리고 내가 나의 어리석은 과거에 얽힌 모든 '일본'을 뿌리치려는 필사적인 발버둥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법률가의 범주에 드는 많은 사람들은 이와 같은 한을
이해해 주지 않는다. 그리고 작년 가을에 아버님께 쓴 편지에서 국내 동포들의 '실리추구 경향'을 지적했던 것 역시 나로서는 '멸시'의 뜻을 내포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1967년 나는 마구 뛰는 가슴을 안고 조국 땅을 처음으로 밟았다. 그로부터 16년... 내 삶의 가장 핵심적인 의미는 그야말로 '일본'을 뿌리치는 것, '우리 나라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선진 일본'에서 조국ㄱ으로 날아온 재일동포 2세의 눈에는 참으로 가소로운 일들이 하늘의 잔별처럼 온 천지에 쫙 깔려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나는 그런 것들을 비웃고 싶은 욕망과 얼마나 치열하게 싸웠는지 모른다. 말끝마다 점잖게 "아, 일본에서는 이렇습니다."라고 말하고 싶은 충동을 얼마나 열심히 눌렀는지 모른다.
그와 같은 모든 노력이 언제나 나의 뜻대로만 되었던 것은 아님을 인정한다. 그렇다고 해도 나는 '자유로운 선진국'의 훌륭한 이론서 수십 권보다 우리 나라의 정직하고 용기 있는 사람들의 땀 한 방울이 훨씬 값지다는 것 정도는 실감하고 있다. 아니, 실감하고 있다고 자처해 왔던 것이다. 그런데 나의 동경의 대상인 바로 그 정직하고 용기 있는 사람들은 적의까지 품고 나에게 말한다. "이놈아, 너의 몸에서는 '다꽝' 냄새가 난다. 너는 쪽발이 흉내나 내고 우리를 업신여기고 있지 않는가!"라고...
뜻밖의 사람이 나의 '재일동포의 통폐'를 꾸짖었다는 충격은 엄청나다. 16년 동안 쌓아 올려 온 내 삶의 의미가 근저로부터 와그르르 무너지고 있는 느낌이다. 비참한 조국의 현실 속에서 조국의 아름다움도 슬픔도 어리석음도 더러움도 모두들 이 양팔에 끌어안고 그리운 사람들과 함께 고통스럽게 허우적거리고 함께 숨을 쉬고 싶었던 나의 소망은 한낱 꿈인가? 망상인가? '재일동포'는 나의 숙명인가? 원죄인가?
그 '통폐'를 나는 얼마만큼이나 지니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국내 동포들이 지금도 나에게서 '쪽발이 냄새'를 맡고 있다는 엄연한 사실이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생겨먹은 대로 '재일동포'로서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그 '통폐'를 극복하기 위한, 언제 끝날지 모를 절망적 몸부림을 계속할 것인가? 나의 마음은 오늘, 이렇게도 외롭게도 방황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마늘냄새가 난다'고 타박, 한국에서는 '다꽝 냄새가 난다'고 타박!
1983년 6월 21일
영실아, 읽어 보아라.
'세월'이라는 것은 편리한 것일 수도 있다. 오랜 세월을 두고 밤낮 쉴 새 없이 흐르는 강물이 울퉁불퉁한 커다란 바위덩어리를 동그랗고 예쁜 조약돌로 다듬어 놓듯이, 때로 우리가 겪어야 하는 커다란 충격은, 그것이 세월의 흐름에 내맡겨짐으로써 우리가 보다 받아들이기 쉬운 크기와 형태로 나누어지고 다듬어지게 되기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5월 24일에 커다란 충격이 되어 나를 때려눕힌 이변호사와의 면회 내용을 너에게 보고하기에 앞서 그것을 한 달 동안 '세월의 흐름에 내맡겨' 보았다.
그날 이 변호사는 우선 우리 아버님이 돌아가신 데 대하여 나에게 정중히 조의를 표했고, 우리는 한두 가지 아버님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 후 곧 소송 이야기로 들어갔다. 이 변호사는 나에게 '준비서면'에 대한 의견을 말해 보라고 했다. 너에게 보낸 5월 14일자 편지에 썼듯이 나는 거기에 대하여 큰 불만이 없지만, 법률 문제에 대하여 좀더 학설적 근거를 동원해서 객관적으로 우리 주장을 설득력 있게 전재할 수도 있지 않았느냐는 취지로 의견을 말했다. 그러나 이 변호사는 마치 검사가 피의자를 추궁하는 것과 같은 기세로 나를 닦아세우기 시작했다. 잠시 어리벙벙하다가 나는 이 변호사가 무엇엔가 굉장히 화를 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입을 다물어 버렸다. 이제 사실상 소송이 종결된 단계에 와서 미주알고주알 따져 가며 다투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증인소환 문제도 이미 지나간 문제, 사상 문제에 대해서도 내가 자필 진술서를 제출한 이상, 거기에 정착되어 버린 나의 사상을 이 변호사가 어떤 식으로 해석하든 그런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지 않은가?
언젠가 너는 이 변호사가 나의 진술서를 높이 평가한다고 했지만 그것은 나에게 듣기 좋으라고 해 보는 거짓말이 아니었을까? 이 변호사는 진술서의 법률 문제 부분은 '체계도 없는 나열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비판했고(그것은 당초에 법원에 제출하려 했던 것이 아니다. 이 변호사가 연구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가능한한 많은 참고사항(학설인용)을 '나열'했던 것이라는 점을 이 변호사는 까맣게 잊고 있다!), 사상 부분은 '하나의 사상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유치하고 잘못된 것'이라고 혹평을 했다. 이 변호사는 진술서 중 '생산수단'운운 하는 부분을 가장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다. 그 부분만 없으면 '서준식은 아무런 주의자도 아니다'라는 주장이 가능해지고 이길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반드시 그렇게는 보지 않지만, 어쨌든 나로서는 그 부분을 없애 버릴 바에는 차라리 전향을 해 버리는 편이 더 시원스러운 해결책이라고 믿고 있다. 온갖 요령을 부리면서, 때로는 전향 이상으로 스스로의 영혼을 모독해 가면서까지 어찌 됐던 형식적 비전향만을 지켜 낸다는 자세는 근본적으로 경멸해야 할 동기에서 나온 것이기가 십상이다.
소송 이야기는 이것뿐이다. 이런 것은 조금도 '커다란 충격'일 수가 없다. 나는 소송 같은 것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는 것이다. 어떤 결과가 나든 그런 것은 조금도 나의 슬픔일 수 없다. 이 변호사가 그토록 울화통을 터트린 것은 물론 내가 '소송 수행에 간섭'을 하기 때문이지만, 그 '간섭'이란 것이 이 변호사에게 직접 간섭할 수 없는(즉, 자유의 몸이 아닌) 내가 편지에 써서 집에다 불만을 토로하면 그것이 '제3자'(그것도 일본인!)를 거쳐서 이 변호사에게 간섭이 가게 되는, 그런 순서로 이루어지기 때문임이 분명하다. 이 변호사는 무어니 무어니 해도 우리 나라의 일류변호사이다. 당연히 프라이드가 있고 또 그 프라이드에 값할 훌륭한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다. 마땅히 우리는 이 변호사를 그런 사람으로 대우해야 했다. 이 변호사의 프라이드를 손상시키는 일이 없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었다는 이야기다. 이 변호사가 불쾌한 것도 당연하다 하겠다.
이 변호사는 입을 다물고 있는 나에게 대성일갈, "자네는 그 교만을 버려! 이 세상에 자기 혼자만이 최고라는 자만심을 고치란 말이다!" 뜻밖의 말이다. 나 같이 못난 만성 자신상실증 환자가 도대체 어디서 교만의 냄새를 풍기는 것일까? 너도 너의 이 오라비가 교만하다고 느끼고 있는 것일까? 이 변호사는 대구에 가서 승 형을 만났을 때의 이야기를 했다. 이 변호사가 찾아가니 승 형은 그야말로 미칠 지경으로 기뻐 날뛰더라고 말이다. 형만한 동생이 없다는 우리나라 속담이 입증되기 위하여 승 형은 어디서나 나를 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만일 내가 형처럼 표정이 풍부하지 못해서 교만 냄새가 난다면 나로서는 얼마나 억울한 일인가!
여기까지만 해도 좋았다. 그러나 그 다음의 이 변호사 말은 나에게는 그야말로 청천벽력이었다. "자네들 재일동포들에게는 아주 못된 버릇이 있다. 그것은 일본에서 일본인들로부터 받은 멸시를 그대로 조국에 와서 조국의 동포들에게 되돌리려는 나쁜 버릇, 이것이 재일동포의 통폐다!" ...이 변호사는 끄떡없는 확신을 가지고 그렇게 단정했다. ... 그래서 나는 한번 스스로를 돌이켜 보겠다고 하고 또 입을 다물어 버릴 수밖에 없었다. 이쯤되고 보니 계속 이 변호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어도 나의 정신은 조금도 소송 이야기 쪽으로 가 있지 않았다. 나의 입을 봉해 버리려는 이 변호사의 '작전'이 주효했다고나 할까. 나의 참담한 심정이 얼굴에 보기 흉하게 번졌는지도 모른다. 이 변호사는 헤어질 때쯤 되어 여느 때의 인자한 표정과 말씨로 돌아가서 언성을 높이고 꾸짖었음을 사과하고, 이런 것도 모두 우리들의 신뢰관계와 유대를 공고히 하기 위한 것이니 섭섭히 생각하지 말라고 했다. 우리는 악수했다. 그리고 우리는 웃으며 헤어졌다.
웃으며 헤어짐으로써 유대는 공고해졌다. 그러나 거듭 말하겠다. "소송 같은 것은 아무래도 좋다!" 이 엄청난 아픔을 어이할 것인가? 그날 밤 나는 물론 수십 번 수백 번 몸을 뒤척이면서 뜬눈으로 지새웠다. 나에게 '재일동포의 통폐'가 있는 것일까? 있을 지도 모른다. 아, 있겠지, 아마도... 적어도 잠재적, 무의식적으로라도... 그렇다면 내가 '재일동포의 통폐'때문에 이 변호사의 방침에 반항했을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나는 일본인 변호사라면 어떤 식으로 소송을 해 나갈 것인지 모르고 있다. 법정으로부터 격리된 조건에서의 궁금하고 답답한 심정의 토로,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 어떠한 불이익을 입는 일이 있어도 '비굴해지지 말아야겠다.', '떳떳하게 고개를 쳐들고 살아가고 싶다.'는 거의 강박관념에 가까운 소망(그것은 12년 전에 그 참담했던 재판이 끝난 뒤부터 지금까지 줄곧 나의 '인간적 타락'을 막아 왔던 하나의 지주였다.) 이 때로는 도도하고 시건방지고 교만이라고도 할 수 있는 분위기가 되어 나의 몸을 휘감았다고 해도 그것은 '재일동포의 통폐'와는 별개의 것이 아닌가 말이다! 더군다나 아키후사 여사의 증인소환 반대는 따지고 보면 나의 사건에 일본인(그것이 어떠한 종류의 일본인일지라도!)이 직접 관여하는 데에 대한 거부, 그리고 내가 나의 어리석은 과거에 얽힌 모든 '일본'을 뿌리치려는 필사적인 발버둥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법률가의 범주에 드는 많은 사람들은 이와 같은 한을
이해해 주지 않는다. 그리고 작년 가을에 아버님께 쓴 편지에서 국내 동포들의 '실리추구 경향'을 지적했던 것 역시 나로서는 '멸시'의 뜻을 내포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1967년 나는 마구 뛰는 가슴을 안고 조국 땅을 처음으로 밟았다. 그로부터 16년... 내 삶의 가장 핵심적인 의미는 그야말로 '일본'을 뿌리치는 것, '우리 나라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선진 일본'에서 조국ㄱ으로 날아온 재일동포 2세의 눈에는 참으로 가소로운 일들이 하늘의 잔별처럼 온 천지에 쫙 깔려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나는 그런 것들을 비웃고 싶은 욕망과 얼마나 치열하게 싸웠는지 모른다. 말끝마다 점잖게 "아, 일본에서는 이렇습니다."라고 말하고 싶은 충동을 얼마나 열심히 눌렀는지 모른다.
그와 같은 모든 노력이 언제나 나의 뜻대로만 되었던 것은 아님을 인정한다. 그렇다고 해도 나는 '자유로운 선진국'의 훌륭한 이론서 수십 권보다 우리 나라의 정직하고 용기 있는 사람들의 땀 한 방울이 훨씬 값지다는 것 정도는 실감하고 있다. 아니, 실감하고 있다고 자처해 왔던 것이다. 그런데 나의 동경의 대상인 바로 그 정직하고 용기 있는 사람들은 적의까지 품고 나에게 말한다. "이놈아, 너의 몸에서는 '다꽝' 냄새가 난다. 너는 쪽발이 흉내나 내고 우리를 업신여기고 있지 않는가!"라고...
뜻밖의 사람이 나의 '재일동포의 통폐'를 꾸짖었다는 충격은 엄청나다. 16년 동안 쌓아 올려 온 내 삶의 의미가 근저로부터 와그르르 무너지고 있는 느낌이다. 비참한 조국의 현실 속에서 조국의 아름다움도 슬픔도 어리석음도 더러움도 모두들 이 양팔에 끌어안고 그리운 사람들과 함께 고통스럽게 허우적거리고 함께 숨을 쉬고 싶었던 나의 소망은 한낱 꿈인가? 망상인가? '재일동포'는 나의 숙명인가? 원죄인가?
그 '통폐'를 나는 얼마만큼이나 지니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국내 동포들이 지금도 나에게서 '쪽발이 냄새'를 맡고 있다는 엄연한 사실이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생겨먹은 대로 '재일동포'로서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그 '통폐'를 극복하기 위한, 언제 끝날지 모를 절망적 몸부림을 계속할 것인가? 나의 마음은 오늘, 이렇게도 외롭게도 방황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마늘냄새가 난다'고 타박, 한국에서는 '다꽝 냄새가 난다'고 타박!
# by | 2007/01/09 16:33 | Post it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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