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사]3-2강

강의:서정민
기록:김효성

종군신부 세스페데스의 활동이 곧 한국 가톨릭 수용의 역사적 시작이라고 보기에는 역사적 단절이 있다. 따라서 한국에서는 그 이후 서학의 학문적 연구를 통해 신앙공동체를 형성하면서 자생적 교회를 수립한 것에서부터 시작을 찾을 수 있다. 문제는 이 자생적 교회의 성격이었다. 원래 개신교는 쉽게 말해 "자기네들끼리의 교회” 성격이 강하다. 즉, 개신교에서는 고백이 중요하다. 기독교회로서의 정체성을 갖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복음과 사도의 전승과 교회의 전통을 받아들인다라는 고백을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가톨릭은 다르다. 가톨릭은 고백 이외에 중앙 교회의 인정이 필요하다. 따라서 선교사 파송 이전에 교회가 수립되었고, 더군다나 교황의 허락 없이(주교의 허락 없이) 주교를 만들고 사제를 만들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한국 가톨릭 교회의 독특성임이 분명하다. 결국 로마 가톨릭은 가성직제도를 인정하지 않았고, 한국에서는 신부영입운동을 펼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뒤이어 파리외방전교회에서 대리주교를 파송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한
국 가톨릭이 창설 되는데, 시기적으로 본다면 예수회 해산 이 후라 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보수 근본주의적 가톨릭 영향을 받게 되었다. 교회 지상주의, 울트라 몬타니즘의 성격을 강하게 갖고 있는 신학적 영향을 갖게 된 것이다. 한국 정부와의 갈등이 빚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물론 여기에는 정치적 이해관계도 얽혀 있는 것이 사실이다. 척사위정의 방법으로 무군무부를 이유로 멸륜패상의 존재로 가톨릭을 인식했다. 특히 대원군 시절에는 이에 더하여 외세라는 사실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이로써 자생적 교회를 수립한 유일하고 고유한 사례로서의 한국 가톨릭은 세계 최고의 가톨릭 수난사를 기록한 교회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 양화진을 절두산이라고 할 정도의 피를 뿌린 역사는 이를 여실히 보여준다. 이런 면에서 한국 가톨릭도 세계 가톨릭이 주목해야할 지역 가톨릭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한국이 예수회적 선교신학 수용 가능성에 대한 질문에서) 기독교의 근본적인 진리를 기록한 서학 서적들, 일종의 성경 요약서 내지는 초보적인 신학서적들이다. 가톨릭의 경우는 옛날에 성경보다 교리서를 읽게 했다. 성경 읽고 해석하는 권한을 제한했던 것이다. 사제권 중에 하나가 성경 강독권이다. 따라서 성경 전체라기 보다는 성경의 발췌 내용을 한자로 번역했던 것이다. 따라서 한국이 예수회적 선교신학을 받아들였다라는 것은 한계가 있다. 다만 정하상이 상제상서와 같은 글을 쓸 수 있었던 것은 강한 압박이 들어올 때 타협의 여지가 생겨났던 것 때문이다. 강한 연결구도가 생겨나기에는 조금 약하고 볼 수 있겠다. 

(한국의 종교성과 그리스도교 신앙 수용과의 관계에 대한 질문에서) 한국의 종교 전통은 비종말론적인 성향이 강하다. 따라서 한국의 종교성을 말할 때 신학적, 기독교적 종교관으로 본다면 비종교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샤머니즘의 경우는 피안과 차안의 구분이 드러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일반론적 종교관으로 본다면 삶 전체가 종교와 얽혀 있다고도 볼 수 있다. 너무 일반적으로 한국의 종교성이 강해서 모든 종교가 들어왔을 때 수용이 잘 된다라고 보는 것에는 그리 동의하지 않는다. 특히 한국의 경우에는 시대를 주도했던 종교가 있었다. 샤머니즘의 경우는 지금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무릎팍 도사가 있기 있는 이유도 이러한 영향 중 하나가 아닐까. 따라서 종교전통이 강하다라는 것은 학술적 입장에서는 좀 더 깊이 바라볼 필요가 있다. 하나 주지해야 할 것은 당시 한국의 상황은 종교적 아노미 상황이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시대를 주도했던 종교전통이 민중의 지지를 잃어가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 때 등장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교주들이다. 또한 한국의 민간 종교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성격 중 메시아즘이 있다. 정감록, 천지개벽을 이루는 누군가가 올 것이다라는 생각을 볼 수 있다. 증산교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이러한 종교적 특성이 민중과의 접촉점을 형성해서 기독교와 어느 정도 맞아 들어갈 수 있었다는 종교학적 추론도 있다. 하지만 역사이해에 있어서는 이렇게 설명하기에는 다소 어렵다.

예수회적 선교방식과 반 예수회적 선교방식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황사영의 백서사건을 두면, 가톨릭 교회 내적 논리에 따르면 그것이야말로 확고한 교회중심 신앙이라고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신앙에 대한 강력한 정체성을 형성한 것으로 보여질 수도 있다. 그러나 역사의 현상적으로 보면 이 후로 말도 안 되는 박해가 시작되어 수난이 확대되었다. 이를 통해 신앙이 확산되었다라고 역사적 해석을 내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자유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중요한 것은 이러한 신앙 내용으로 인해 신앙을 가질 만한 상황이 상당히 어려웠졌다는 것이다.

가톨릭의 반민족적 성향을 개신교 선교사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체 (다를 이, 몸 체) 선언을 한 것이다. 개신교는 카톨릭과 다르다라고 말한 것이다. 그 이유는 첫째, 우리는 반 민족적이지 않다. 나라가 망하던 흥하던 교회가 잘되면 된다라는 사고방식을 갖고 있지 않다. 둘째, 가톨릭은 정치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데 개신교는 정교 분리다. 우리는 순수 복음만 전할 뿐이다. 이렇게 이체 선언을 한 것이다. 황사영의 가톨릭과는 질적으로 다르다라는 선언을 통해 선교의 여지를 확대하고자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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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liards | 2009/03/31 01:07 | Lectures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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