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사]7강

강의: 서정민

기록: 김효성

1. 남북방 선교루트의 합류

1884년 12월 초에 갑신정변이 일어나는데 그 때 북장로교 의료 선교사로 알렌이 들어와 있었다. 우정국 개설 연회에 급진 개화파가 정변을 일으켰는데 이 때 보수파의 실세였던 민영익이 큰 상해를 입었다. 알렌은 비록 전문적인 의과 기술을 보유하고 있지 않았지만, 40일여일 간의 치료를 통해 민영익을 살려냈다. 결국 갑신정변은 실패해서 개화파는 일본으로 망명했고, 보수파가 정권을 장악했는데, 알렌의 치료가 계기가 되어 의료 선교기관을 설립하게 되었다. 알렌은 병원 설립을 건의했던 것이다. 그것이 제중원의 출발이다. 성격으로 본다면 반국영선교기관이라고 볼 수 있다. 제중원은 병원의 역할 뿐만 아니라 한국선교의 전초기지역할을 했다. 초기 선교사들이 한국에 도착했을 당시 처음에는 제중원에서 활동을 했던 것이다. 언더우드는 제중원 의학교실에서 물리와 화학을 가르쳤다. 언더우드 뿐만 아니었다. 감리교 출신 선교사 스크랜턴, 아펜젤러도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제중원 공동체의 연합선교기관 역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현상적으로 에큐메니컬적 선교기관의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한국 최초의 복음선교사로 명명되는 장로교회의 언더우드, 감리교회의 아펜젤러는 1885년 4월 5일 부활절에 제물포에 상륙, 내한한 이후 교육선교사로서의 활동을 시작을 시작했다. 아펜젤러는 배재학당을, 메리 스크랜톤은 이화학당을, 언더우드는 경신학교를 시작했던 것이다. 이들 최초 선교사들의 활동이 괘도에 오르면서 각 교파별로 많은 수의 선교사들이 내한하여 한국 전역에서 활동했다. 언더우드와 서상륜 전도 공동체의 만남과 새문안 교회의 설립을 통해 볼 수 있었던 남북방 선교루트의 합류는 이미 앞선 강의에서 논의되어진 내용이다.

2. Triangle Method

이렇게 한국에서 선교활동이 활발하게 진행되었고 한국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한국 선교에 있어서 뚜렷하게 나타났던 중요한 특징으로, 병원, 학교, 교회의 삼각 구도가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선교사들은 선교할 중심지역을 확보하고 (이를 선교 스테이션이라 한다) 이 지역에서는 병원, 학교, 교회의 설립이 이어졌다. 남장로교 중심으로 펼쳐진 광주 스테이션에는 광주기독병원, 숭일학교, 광주제일교회가 설립되었다. 감리교, 장로교가 스테이션을 두었던 평양에서는 장로교 - 제중병원, 장대현교회, 숭실, 숭의학교가 설립되었다. 감리교 - 기골병원, 남산현교회, 광성, 정의학교가 설립되었다. 서울에서는 제중원 의학교, 배재, 이화, 경신학교, 새문안교회, 정동제일교회가 설립되었다.

트라이앵글 메소드는 장로교, 감리교에서 공통적인 방법이었다. 그러나 선교신학의 측면에서 보았을 때는 경향성의 차이가 있음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장로교 선교신학에서는 교회가 최종 목표였다. 즉, 교회의 설립을 위한 하나의 프로세스로 병원과 학교의 설립과 운영을 이루었던 것이다. 병의 치료의 최후 단계는 신앙생활이었고, 치료된 자를 통한 지역 전도까지를 목표 삼았던 것이다. 학교와 병원은 교회를 향하고 있는 것으로 개별적 독립성은 약하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감리교 선교신학은 병원과 학교 설립과 운영 그 자체에 선교의 의의를 두었다. 즉, 예수의 사랑을 가르침으로, 치료로 최선을 다해 보여주는 것 자체로 선교 의미를 삼았던 것이다. 따라서 병원, 교회, 학교가 각각의 개별적 완성체로서의 선교기관으로 자리잡았음을 발견할 수 있다. (여기서 감리교와 장로교의 차이가 나온다. 감리교는 굴레를 뒤집어쓰고서라도 학교가 존재하는 것 그 자체로 의의를 두었다. 그래서 신사참배 강요, 종교교육 배제 등의 상황 속에서도 학교 유지에 힘을 쏟았다. 그리하여 정규학교로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에 비해 장로교는 존재 자체로의 의미 보다 기독교 정신의 교육에 보다 중심에 두었기 때문에 문을 닫는 경우가 많았다.)

한반도라는 좁은 땅에 이처럼 많은 선교회가 활동하기 시작하면서 사업의 중복, 불필요한 갈등이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이에 주요 선교교파들 사이에서 이른바 교계예양이라는 선교구역 분할협정이 체결되어 교파마다 할당된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을 벌이게 되었다. 이는 대단히 효율적인 측면이 있었는가 하면, 한편으론 각 교파간의 정교한 신학적 차이가 이식됨으로써, 훗날 이것이 한국교회의 신학적, 신앙적 분열의 한 배경으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어찌되었든 한반도의 지역분할이 이루어졌다. 미국의 북장로교는 서울, 황해도 재령과 해주, 평양, 선천과 의주까지 연결하고, 남쪽으로는 청주와 대구를 이었다. 평안남북도 일부, 황해도 일부, 서울과 경기도 일부, 충청북도, 경상북도 대부분을 차지했다. 미국의 남장로교는 전라남북도와 제주도를 차지했다. 이곳은 신학적으로 보수적 경향성을 보이다. 캐나다 장로교는 원산을 출발하여 함경남북도, 간도에 이르기까지를 차지했다. 호주 장로교는 경남남도와 부산을 차지했다. 북감리교는 서울과 서울 남쪽 경기도(수원 스테이션), 충청남도(공주 스테이션), 강원도 남쪽 지역(원주를 중심으로), 황해도 일부, 평안남도 일부, 평양, 평북의 일부를 차지했다. 남감리교는 서울, 서울 북쪽 경기도, 강원도 북쪽 지역(춘천을 중심으로)을 차지했다. 이 정도가 간략한 분할양상이다. 이 틈새에 성공회, 성결교, 오순절 등이 자리를 차지했다.

신학적으로는 주류 6개 교파 중에서 가장 진보적 신학성향은 캐나다 장로교에서 보였다. 함경도 지역에 캐나다 장로교에 뿌리를 둔 현재 교단이 기독교 장로회이다. 그 다음은 북장로교이다. 북장로교보다 조금더 보수적 성향을 보이는 교단이 남장로교이다. 가장 보수적인 성향은 갖고 있는 교단은 호주 장로교이다. 호주 장로교는 근본주의 신앙 유형이라 봐도 된다. 남감리교는 북감리교보다 보수적 성향을 갖고 있었다. 교파마다 다른 선교신학과 신앙고백의 차이는 여러 문제들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신학적 갈등의 시초라고도 볼 수 있겠다. 선교 수행에 있어서는 긍정적이었다고 볼 수 있으나 지금의 신학적 차이, 교파 갈등에 있어서는 책임을 회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교계예양과 스테이션 문제를 보다 심층적으로 자세하게 살펴보지 않으면 안된다. 한국인들에게 있어서 교파 선택의 이유는 교회의 신조, 전통, 제도의 차이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지역적 교파 분할에 따라 자연스럽게 해당 지역의 주도적 교파에 의해 신앙을 받아들이게 되었던 것이다. 한국교회 분열의 시발점이었다는 비판도 가능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3. 네비우스 선교방법

트라이앵글 메소드 외에 또 다른 특징은 삼자(三自)로 특징지어지는 네비우스 선교방법을 채택한 것이었다. 한국의 선교사들은 선교 경험을 보유한 중국 선교사 네비우스를 초청해서 그 경험을 공유했다. 여기에는 장로교 선교사들이 중심이 되어 모였다. 그의 선교 방법을 네비우스 선교방법으로 말하는데 재밌는 것은 이 방법은 네비우스가 중국에서 실패한 것을 반면삼아 제안한 것이었다는 사실이다. 즉, 중국에서는 실제로 적용되지 않았던 방법이었던 것이다. 이 중심은 삼자 원칙이었다. 자전, 자력, 자치이다. 한국인 전도자를 양성하여 한국인 스스로가 전도하게 하는 것, 한국인이 주체가 되어 스스로 교회를 세우고 운영하게 하는 것이다. 재정적인 부분의 독립도 여기에 포함된다. 이러한 방법은 지금의 한국교회 선교방법에도 유의미하다. 이 방법은 한국선교 초기 발전의 큰 원동력이라고 평가된다.

4. 선교 에큐메니즘

연세 신학의 중요한 기둥 하나가 에큐메니즘이라고 할 수 있다. 교파를 초월하여 기독교 복음과 신앙의 확장을 위해 연대하는 것이 기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당시에는 에큐메니즘이라는 말이 없는 시대였다. 따라서 이 말은 당시대의 현상적 양상을 지금의 시대에서 바라보는 것을 의미한다. 즉, 당시 한국 선교를 하는 과정에서 에큐메니컬적 양상을 보인다는 것이다. 당시 선교사들의 연합 활동에 주목해 볼 때 이러한 양상을 잘 살펴 볼 수 있다. 1905년에 선교사 공의회에서 한국기독교회라는 한국 프로테스탄트 단일 교회 설립을 꿈꾸었던 것은 확실한 증거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선교 지역에서의 선교사들의 이상은 선교 본부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선교지와 선교본부와의 견해차가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 타협점이 선교 활동에 있어서 문서, 성서 번역, 찬송가 사용, 교육, 의료, 청년운동 등에서는 연합활동을 하는 것으로 모아졌다고 볼 수 있다. 이를 기반으로 오늘날의 에큐메니즘 신학이 형성된 것이다.

그렇다면 에큐메니즘 신학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동일한 신조와 동일한 예전, 제도를 가진 하나의 교회를 만드는 것이 목표인가? 이러한 제3의 교회를 만드는 것이 목표인가? 아니다. 통일이 아니라 화해와 이해가 목표이다. 주지해야 할 사실이다. 하나 하나의 다양성을 충분히 이해하는 것이다. 좁은 의미에서 교파간의 다양한 신학과 신앙유형을 상호 이해하면서 공동 목표를 향해서는 상호 연대하는 것이다. 더 확대해서는 개신교와 가톨릭 사이의 이해를 추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신구교간의 구원론 부분에서는 확연한 차이가 있다. 1999년에 이르러서는 요한 바오로 2세와 개신교 첫 교단이라고 할 수 있는 루터교 총회장 사이에서 구원론 상호 인정의 화해 협정이 조인되었다. 최근에 진보적 학자들 사이에서는 진리의 표준으로 들어갈 때, 타 종교 간의 근본진리가 공유 가능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종교간의 에큐메니즘 논의도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교리적으로, 신앙적으로 모든 것을 통일할 수는 없다. 공동 목표를 위해 서로 연대하자는, 보편화를 지향하지만, 특수를 상호 존중하는 지향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http://boundary.egloos.com/1476514 

by Goliards | 2009/06/22 16:37 | Lectures | 트랙백 | 덧글(0)

트랙백 주소 : http://goliards.egloos.com/tb/4988741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

:         :

:

비공개 덧글

◀ 이전 페이지 다음 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