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사]8강

강의: 서정민

기록: 김효성

한국민족교회, 과연 좋은 것인가? 민족과 교회, 어느 것이 더 큰 개념인가? 민족교회는 이런 측면에서 보편성을 제한받는다. 교회는 복음을 확장하는 공동체로서 어느 민족,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공동체여야 한다. 그러나 민족교회는 만민 복음화된 진리를 다시 선민 복음화하는 역행과 연결될 수도 있다. 따라서 역사적으로, 신학적으로 민족교회는 그리 좋은 개념은 아니다. 보편성의 특수성에 의한 제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특수성에 주목해 보자. 한국민족교회는 기타 민족교회와 구별되는 다른 특수성을 가지고 있을까? 게르만의 민족교회를 보자. 게르만 민족의 나치즘이 가져온 유대 민족과의 갈등은 선민 대 선민의식의 갈등이라고 볼 수 있다. 결국 이 갈등 속에서 힘의 우위를 확보한 게르만 민족이 선택한 극적인 방법은 학살, 곧 힘으로 억누르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들이 신앙이 없었던 자들인가? 히틀러도 기독교 신앙을 가진 자였다. 당시 교회는 이러한 게르만 민족 성향에 그대로 동조했다. (물론 저항의 경우도 있다. 본회퍼의 경우는 그 대표적 인물이다.)

그렇다면 한국 민족교회와 게르만 민족교회를 비교해서 보자. 여기서 특수성을 발견할 수 있다. 차이는 무엇인가? 민족이 사라져 없어져 버릴 수 있는 심각한 고난의 상황에 처해 있는 한국의 역사적 고난의 십자가를 함께 졌다는 것, 여기서 한국민족교회의 특수성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것이 한국민족교회를 긍정하게 하는 이유다. 오해는 없어야 한다. 한국민족교회와 게르만 민족교회의 역사적 실존을 이분법적으로 단순화 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양상을 큰 차원에서의 경향성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전히 한국적 상황 속에서 민족주의가 가진 유의미성을 이해해야 한다. 한반도의 분단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민족주의에서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족주의가 내포한 위험성은 기억해야 한다. 한국의 민족주의가 방어적 입장에서 공격적 위치로 변화된 계기는 베트남 전쟁이었다. 다른 민족을 억누르면서 집단적 우위를 경험한 것이 베트남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베트남 전쟁에 참전해야 했던 역사적 상황은 분명 이해할 수 있는 것이나, 제3세계에서 경험한 잔혹성은 결국 한국 민족주의에 대한 질타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한국민족교회에 대해 긍정할 부분과 비판할 부분을 냉정하게 살펴보며, 예언자적 시각을 견지해야 할 것이다.

1. 초기 한국교회와 민족운동

한국교회는 충군애국의 교회가 될 수 있었다. 당시의 나라 개념은 왕의 나라 개념이 강했다. 왕의 백성들로서의 자의식이었다. 왕에게 충성을 다하는 교회로서의 충군애국 교회라는 의미가 여기에서 나온다. 또한 한국 기독교의 수용사적 특징에서 이미 살펴보았듯이, 한국 기독교의 수용은 다른 제3세계의 경우와는 달리 서구문명의 침략 루트와 복음 수용 루트가 분리되어 있었다. 여기서 복음을 통해 민족의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다는 희망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 초기의 엘리트 지도자들의 시각은 어땠을까? 이데올로기적으로 기독교가 서구문명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 그 뒤에는 미국이라는 나라가 있다는 것이 하나의 매력이 되었을 것이다. 이는 항일, 일본을 극복할 수 있는 문명으로서의 매력이 있다. 그리고 다른 것으로는 조직으로서의 교회에서 매력을 보았을 것이다. 즉 민족운동의 목표와 조직으로서의 교회, 민족운동의 명분으로서의 성서와 네트워크로서의 조직을 가진 교회는 대단히 매력적인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상동파와 헤이그 밀사사건이다. 김 구, 안창호, 이승만, 이동휘, 이동녕, 전덕기, 이 준, 이상설 등 민족운동가 중에서 상당수가 상동파였다. 기독교인들이었던 것이다. 이 상동그룹이 계획했던 것이 헤이그 밀사였다. 그리고 이 상동파를 실질적으로 지도한 목회자가 바로 전덕기 목사였다. 상동청년학원을 통한 교육사업, 상동시약소를 통한 병원사업이 여기서도 이루어졌다. 강력한 민족운동 그룹이었다. 이들은 무장독립운동까지도 계획했던 자들이었다. 기독교와 민족운동이 자연스러운 조합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민족운동을 위한 결사, 조직에 대해 염려했던 그룹이 있었다. 첫째는 선교사들이었고, 둘째는 일본이었다. 일본은 한국 기독교인들을 긍정할 수가 없었다. 민족기독교적 특징을 가장 싫어한 그룹이 바로 일본이었다. 선교사들의 경우는 현실적으로 한국교회가 일제의 힘에 의해서 말살될 수 있겠다는 우려, 민족운동으로 인한 교회조직의 와해 위험성이 하나의 이유였고, 다른 하나는 이들의 복음주의 신앙 유형에 입각한 개인 영혼구원의 완성을 추구했던 경향성 때문에 교회 안에서의 민족운동 참여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선교사들에게는 불안한 현실일 수밖에 없었고, 기독교적 정체성에도 일치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들은 “정교분리”를 내세워 민족기독교적 성격을 견제했다.

2. 선교사들의 한국상황 인식 변화

종교공동체가 아니라 정치공동체가 될 수 있겠다라는 우려 때문에 선교사들은 정교분리 원칙을 내세웠다. 일제는 이러한 선교사들의 정교분리원칙을 당연히 환영했다. 그러나 이는 "정교분리"에 대한 잘못된 적용이었다. 정교분리원칙이 왜 만들어졌는가를 고려해 보자. 사실 정교분리는 국가 권력이 교회의 신앙운동을 간섭, 제한, 탄압하는 차단하기 위해 내세운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교분리 원칙이 선교사들과 일제에 의해서, 한국의 상황에서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적용된 것이다. 따라서기억해야할 것은 정교분리 원칙은 교회의 고유한 신앙 사명을 지켜내기 위해 고안된 것이었다는 점이다. 곧, 교회의 고유한 사명은 국가 권력이 진리에 어긋나는 양상을 보일 때면 예언자적 사명을 수행하는 것이다. 기독교인의 삶이라는 것은 총체적인 양상을 가진 것을 기억해야 한다. 영혼구원, 영성주의에 함몰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역사적 존재로서의 삶이라는 것이다. 결국 역사적으로 한국에 있어서 정교분리의 원칙이 잘못 적용되었음을 이해해야 한다.

선교사들은 일제의 한국점령을 기정사실화 하고 독립의 가능성을 높게 보지 않았다. 따라서 한국교회의 신앙 양태에 대한 우려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일정부분 옳은 측면이 있다. 이데올로기적 신앙 양태를 보이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신앙이 아니라 하나의 사상 내지는 방법으로 자리잡고 있는 양상도 보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상동파 일부에서는 공산주의에 귀의한 자들도 있었다. 민족운동을 위해서는 기독교보다 공산주의가 보다 효과적일 수 있다는 판단을 했던 것이다. 이동휘의 경우는 민족종교로서 대종교를 선택하기도 했다. 선교사들의 우려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측면이다.

3. 1903년 원산부흥운동과 선교사 사경회

대부흥 운동의 프로세스는 머리의 신앙에서 가슴의 신앙으로 옮기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1903-1910년 사이의 대부흥운동 기간에서 1907년의 대부흥은 한국교회사의 획기적인 사건이다. 사관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은 시기구분과 컨텐츠 선택이다. 한국교회사 시기구분의 중요 획기를 그은 것이 바로 1907년 대부흥운동이었다. 그 시작은 1903년 원산부흥운동에서 찾아볼 수 있다. 남감리회, 캐나다 장로회 선교사들의 사경회가 시작되었다. 선교사들의 사경회에서 하디가 회개한 것이 발단이 되었던 것이다. 자신의 오만함에 대한 회개였다. 같이 모인 선교사들이 너나 할 것 없이 함께 고백하며 회개했다. 하디의 눈물은 1907년 대부흥운동으로 이어졌다. 하디는 평양으로 초대받아갔고, 선교사들에 대한 인식이 변했다. 그리고 선교사들의 회개에 한국인들도 함께 동참하게 되었다.

4. 1907년 대부흥운동

종교가 이데올로기로 머물게 되면 그 힘이 없어진다. 기독교 사상이 기독교는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한국의 초기 크리스찬은 기독교 사상에 동의했다. 기독교적 가치관에도 동의했다. 기독교가 가진 현실적 힘과 목표도 동의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자신의 영혼과 목숨을 걸 수는 없었다. 신앙은 외부인들의 눈에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인데 신앙인들에게 있어서는 목숨을 걸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신앙의 논리라는 것은 종교로서의 속성을 통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초기 한국교회와 민족운동의 과정에서는 전체적 측면에서 이데올로기적 상황을 갖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신앙적 표현이 아니라 기독교적 가치관에 대한 긍정적 표현이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1907년을 기점으로 1907년 이전의 한국교회는 초기의 한국교회라고 할 수 있다. 선교사들은 이러한 민족적 가치가 신앙적 가치보다 위에 있는 상황, 그럴 수밖에 없는 역사적 컨텍스트를 이해하면서도 염려하고 있었다. 하나는 일제가 이 집단을 내버려 두지 않을 것과 다른 하나는 기독교의 최종 목표가 이것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이러한 인식의 변화에 발맞추어 선교사들 가운데 갱신 운동이 일어났다. 그리고 부흥 운동으로 일어났다. 양상은 부흥 운동이었으나, 그 내용과 본질은 회개 운동이었다. 기독교는 진심으로 회개하면 부흥이 일어난다.

선교사들은 회개운동을 통해서 한국인들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었다. 그리고 한국인들을 선교사들을 통해서 죄의 고백을 접했다. 여기서 한국인들이 접했던 죄의 고백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선교사들의 죄는 하나님 앞에서의 죄였다. 기독교적인 죄 고백은 다른 사람이 내 죄를 알건 모르건 하나님 앞에서 죄라는 측면이 강하다. 그 제일 마지막 죄는 원죄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전통적으로 사람에 대한 죄를 가지고 있었다. ‘인간의 도리를 못했다’라는 등의 개념이다. 선교사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 죄를 고백, 하나님 뜻에 어긋난 자신의 죄를 고백했다. 이것이 한국인들에게는 어떻게 인식되었는가? 어떻게 전해졌는가? 하나님 앞에서 오만했고, 한국인을 사랑하지 못했다는 고백은 한국인들에게는 실감나게 전해지지 못했다. 그러나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문제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한 고백이 한국인들에게 커다란 감흥을 일으켰다. 그리고 용서와 화해가 그 고백 가운데 넘쳤다. 길선주의 역할이 여기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죄 고백에 대한 사고 구조의 번역을 길선주가 한 것이다. 길선주는 죄 고백의 사고구조를 번역하면서 동시에 예배 의식의 코드도 접목시켰다. 새벽기도회는 그 좋은 본보기이다. 길선주는 이런 면에서 보수적인 신앙을 받아들인 사람이지만, 동시에 토착화 신앙을 이루어낸 사람이기도 하다. 원산에서 시작한 부흥운동이 이렇게 해서 평양에서 폭발적으로 일어났고,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민족운동의 차원에서 교회에 왔던 사람들이 이제는 신앙운동의 차원으로 전환되기 시작했다. 이 과정은 민족운동의 엘리트들에게는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 민족, 공동체가 사라지고 개인의 영혼, 죄 고백과 화해가 중요하게 자리잡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모습 속에서 이데올로기적 기독교 가치관을 가진 민족운동가들은 실망을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한국교회는 이전과 달라진 모습을 갖게 되는데 그것은 한국교회의 리더가 성직자들, 종교적 목적을 가진 신앙인들로 옮겨가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나중에 이런 사람들이 3․1운동의 지도자들로 드러나는 것을 보게 된다. 여기에 역사의 묘미가 있다.

이와 반면에 이러한 대부흥운동을 바라보고 긍정적으로 판단한 그룹이 있었다. 바로 선교사 그룹과 일제였다. 사회적인 문제에만 극단적으로 치우친 신앙 그룹을 이데올로기적 신앙 그룹이라 한다면, 신앙적인 문제, 초월적인 문제에만 극단적으로 치우친 신앙 그룹은 마리화나적 신앙 그룹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양 극단에 치우친 기독교는 반기독교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데올로기적 신앙 그룹은 반신앙적 태도를, 마리화나적 신앙 그룹은 반역사적 신앙 태도를 보이기 때문이다. 이 둘 사이의 균형 감각이 중요한 것이다. 대부흥운동 이 후의 한국교회를 비판하는 것은 신앙적 문제에로의 관심에만 기울이게 되었다는 측면 때문이다.

5. 백만명구령운동과 105인 사건

선교사들은 이를 통해 용기를 얻어서 백만명 구령운동을 벌이게 된다. 그러나 이 운동은 철저하게 실패했다. 사람의 기획과 판단, 추진 만으로는 부흥운동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역사가 보여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일제는 안심하기 시작했다. 개인만 있고, 신앙만 있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일제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신민회의 조직과 활동, 105인 사건이 그 사례이다. 이데올로기적 투쟁과 신앙적 투쟁은 큰 차이를 보인다. 바로 사회운동을 해도 기독교 신앙의 내연을 거쳐서 하는 것은 그렇지 않은 것이 차이가 난다는 것을 일제가 인식하게 된 것이다. 일제가 대부흥운동이라는 신앙적 내연화를 거치고 난 기독교인들에 의해 표출되는 신앙 양상을 무시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 지도자들 말살을 꾀하게 된 것이다. 날조된 혐의를 뒤집어 씌운 것이다. 이것이 105인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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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liards | 2009/06/22 16:52 | Lectures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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