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사]9강

강의: 서정민

기록: 김효성

3.1운동은 한국민족사 전체에서도 가장 중요한 운동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결과론적으로는 실패한 운동이었음에도 그 운동이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이는 1919년, 1910년대의 세계사적 흐름에서 바라봐야 한다. 제국주의적 침략국가와 피지배국가의 상황, 전세계적으로 피압박 상태에 있었던 상황이 그것이다. 당시는 독립주권 쟁탈운동이 많이 있었을 수밖에 없었는데, 3․1운동은 그 중에서도 주목해 봐야 하는 운동이다. 성숙한 독립운동, 고차원적인 독립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백미는 적대와 분노를 표현하기 마련인 피압박민족의 운동양상이 그대로 적용되지 않았다는 것에 있다. 독립상실에 대한 상당부분의 책임을 스스로에게 물으면서 자기고백적 내용이 담겨져 있는 독립선언서가 그 증거이다. 또한 방법론적 차원에서 비폭력 저항운동이었음을 주목해봐야 한다. 평화적 독립쟁취운동이었다는 것이다. 이 당시의 독립운동은 계층적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높았다. 러시아에서는 볼세비키 혁명이 있었다. 그런데 3․1운동은 계층간의 통합운동으로서 기능했다. 남녀노소, 빈부귀천의 차이를 극복한 계급통합적 운동이 펼쳐졌다는 것이다. 한국처럼 사건과 시점을 기점으로 근대성의 변화를 경험한 나라는 없다고 봐도 된다. 이로써 나라의 주인이 왕이 아닌, 국민이 되었다. 3․1운동 직후 임시정부가 수립되면서 주권재립이 선포된 것은 그 의미를 충분히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근대의식 형성의 기폭제이며 전환점이었다. “우리나라”라는 개념이 자리잡게 된 것이다. “그”가 나라의 주인이라는 의식에서 “내”가 나라의 주인이라는 의식이다. 그래서 3․1운동은 지금도 놀라운 사건으로 자리하고 있다. 정신성, 운동성, 통합성, 추진성에서 주목할 수밖에 없는 운동이다.

그런데 이 운동이 한국의 외래 수용 종교인 기독교에 의해서 추진되었다는 것이 한국기독교 공동체가 가지고 있었던 사회참여적 에너지를 볼 수 있는 중요한 시점이다. 사회참여 신앙에 대한 진지한 통찰, 신앙의 열정이 여기에 포함되어 있다. 1907년이라고 하는 시기를 볼 때, 목적론적 기독교 신앙에서 신앙 자체가 의미가 되는 신앙으로의 전환을 이루었음을 살펴보았다. 기독교 신앙의 종교화가 이루어졌다. 따라서 내면 종교, 내세 종교로 치우쳤다고 비판을 받기도 했다. 특히 사회운동, 사회주의자들의 비판이 일어났다. 그렇게 비판받고, 폄하되는 와중에 기독교가 3․1운동의 주체적 세력으로 등장한 것이다.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사회참여를 적극적으로 주도할 만한 인맥이 사라져 버린 상태에서 (105인 사건은 그 배경이 된다) 3.1 운동이 일어났다. 사회참여 의식이 박약하다고 볼 수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3․1운동이 일어났던 것이다.

1. 3․1운동의 시작과 전개

2․8독립선언과 동경 YMCA, 동경에 유학하고 있던 한국 크리스찬 학생들이 독립선언을 했던 것이 중요한 배경이 된다. 적의 심장에서 한국독립을 선언한 것이다. 그리고 민족대표 33인이 구성되었다. 16명이 기독교인이었다. 이승훈 장로를 빼면 나머지는 당시대에서 그리 유명한 인물들이 아니었다. 이들은 독립선언서에 서명을 했는데, 이는 곧 죽음을 각오한 일이었다. 그러나 민족대표가 중심이 되어 독립운동을 주도했다고는 보지 않는다.

2. 3․1운동의 진행과정과 기독교의 기억

시작단계와 이념제공 문제, 즉 고상한 독립선언의 정신에 기독교만 중요한 이념제공의 역할을 했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모든 사상에서 있어서 일정부분의 공통성이 여기에 함께 발견되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기독교의 고유한 측면에 주목하고자 한다. 그것은 채널, 곧 네트워크의 역할이다. 한반도의 철도, 교통, 우편은 모두 일본인이 장악하고 있었다. 1909년경 전국적인 조직이 사라졌는데 보부상 조직이 그것이었다. 일제는 한국인들 자체적 조직을 두려워하여 이 조직을 없애버렸다. 이 때 유일하게 남아있던 조직이 바로 교회였다. 3% 전후의 비율에 불과한 기독교인들의 조직이었다. 일제는 교회의 조직계통에서 이루어지는 연통은 검열을 하지 않고 있었다. 따라서 전국적 운동으로 비밀리에 진행되어야 하는 운동을 바로 기독교가 했던 것이다. 천도교는 전국적 조직이 아니었고, 불교 또한 마찬가지였다. 기독교가 담당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다. 학교와 교회, 병원이 연락망을 구성했다. 모이는 장소가 기독교 학교, 병원, 교회였다. 이로써 전국의 대도시들에서 3월 1일 정오에 동시에 태극기를 들고 운동이 일어날 수 있었다. 통신체계의 두절상황과 마찬가지였던 당시 상황에서 보면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전국의 읍,면,리까지 퍼져나가기까지 1달여 간의 시간이 걸렸는데, 이 또한 당시의 상황에서는 놀라운 속도였다. 결국 기독교는 3․1운동의 하드웨어 역할을 담당한 것이다.

더 주목해야 하는 것은 “수난과 대속, 희생의 역할”이다. 3․1운동은 실패한 운동이었다. 일제는 불순분자에 의한 독립소요사건으로 보았다. 그리고 그 주동자들을 기독교인으로 지목했다. 그래서 감옥에 끌려간 사람들의 40%이상이 전 인구의 3% 내외에 불과했던 기독교인들었다. 역사적 실존에서 기독교인이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 무엇인가? 다른 사람들을 대속해서 억울함을 뒤집어쓰는 모습이 아니겠는가? 당시 기독교인들의 모습이 바로 이러했다. 시작단계, 이념제공의 문제를 상수도, 역사적 공헌, 훈장으로 본다면 그러나 그 이면의 드러나지 않는 하수도, 곧 쓰라린 희생과 수난의 경험을 기독교가 담당했다는 것이다. 대의명분의 명분성에서 한국독립운동은 확실한 족적을 남겼다. 상생과 평화의 정신이 그 중심이다. 그리고 그 이후의 수난과 희생을 기독교가 담당했다. 그리하여 이제 한국 기독교인들의 자각이 이루어졌다. 즉 역사적 실존으로서의 신앙인으로서의 자각이다.

3. 3․1운동의 역사적 의의와 기독교

흔히 3.1운동의 정신성에서만 기독교의 역할을 중요하게 생각하곤 한다. 그래서 기독교가 비폭력 평화운동의 정신적 중추로 기여했다라는 평가를 내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신성에 있어서는 다른 종교, 다른 사상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천도교, 불교에도 비폭력 평화정신이 없다고 배제할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순히 사상적 풍조로 끝나느냐, 사상이 행동으로 이어지느냐는 큰 차이가 있다. 행동을 유발하는 동기로서의 정신성도 중요하지만 교회사에서 그러한 정신이 실존으로 표현되는 것을 살피는 것이 더욱 중요한 것이다. 교회사에서 교리적, 사상사적 흐름만으로는 불충분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즉, 실천과 행동, 실존적 고뇌가 들어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이 운동이 가지고 있는 실천력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때 기독교의 역할, 기여가 보다 면밀히 살펴볼 수 있다. 교회는 네트워크를 제공했다. 또 하나 주목하는 것은 실패한 운동으로서 역사적 책임을 바로 기독교가 졌다는 점이다. 기독교인의 역사적 실존은 무엇이겠는가? 이 세상에서 다른 사람보다 희생과 대속의 삶을 사는 것 혹은 삶의 축복을 누림, 그 둘 사이에서 과연 무엇인가? 3.1운동은 수난과 대속, 희생의 역할을 감당했던 기독교인의 실존을 보여준다. 그래서 기독교는 집단 학살, 투옥 등의 고난을 겪었던 것이다. 3.1운동 후 한국교회는 기독교 지도자들의 투옥으로 인해 연회를 열 수 없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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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liards | 2009/06/22 17:23 | Lectures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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