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사]11강

강의: 서정민

기록: 김효성

일제말기는 질곡의 시기라고 한다. 어둠의 골짜기가 있다는 것은 역사가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여기서 세밀한 역사의 교훈, 교회사적 관점에서는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할 수 있다.

1. 일제의 민족말살정책과 기독교정책

일제의 한국통치는 시기별 구분이 가능하다. 36년간의 한국통치기 안에 식민통치의 방법론이 수 차례 변경되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한국을 일본과 하나의 나라로 만들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초기에는 자신감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민족사, 문화사적으로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30년대 들어오면 한국을 완전히 내지화하기 위해 민족말살정책을 편다. 한국의 역사, 문화, 말, 정신을 계승하게 한다면 내지화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식민지 청년을 강제 징병하여 군인을 양성했으며, 포로들 관리에 있어서도 상당수의 조선 청년들을 이용했다. 후에 전쟁전범 중에 많은 수의 한국인들이 처벌되기도 했다.

1937년, 일본은 중국과 전면전을 치룬다. 그리고 1941년에는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 이 시기의 일본정책은 이전과는 판이하게 다른 분위기의 정책이었다. 그 명징한 예가 바로 문화말살정책이었다. 삶의 양식인 문화, 혼이 담긴 종교를 바꾸는 것이었다. 문화정책과 종교정책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창씨 개명, 외국어로 전락한 국어, 일본어의 모국어화, 역사교육의 부재. 말과 글과 역사를 바꾼 것이다. 여기에 일본의 준국교라고 볼 수 있는 신도의 강요도 있었다. 일본은 신도를 국가신도와 교파신도로 나누어서 국가신도는 종교 위의 종교로 초종교화 했다. 그리하여 국가신도는 모든 국민의 종교가 되도록 했고, 교파신도는 취사선택의 문을 열어두어, 불교, 기독교 등과 그 레벨을 같이 했다. 이 국가신도를 조선에도 강요했던 것이다. 1920년대부터 조선신궁을 남산에 짓기 시작했으나 강제참배는 요구하지 않았는데, 1930년대를 지나면서 점차 강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또한 일본에서 시작된 종교단체법을 한국에서도 적용하기 시작했다. 서구 전통과의 단절을 의도하며 내부의 단일화를 꾀하고자 했던 것이었다. 이것은 심각한 종교통제법이었다. 종교신앙의 자유와 정교분리가 무시되고, 전근대적 통치가 이루어졌다. 일본 내부에서 뿐만 아니라 외부, 곧 조선에서도 마찬가지의 방식이었다. 국가신도는 종교가 아니라고 하지만, 국가신도는 종교임에 틀림없는 것이었다.(첫째, 국가신도에 대한 참배에서 축복을 빌고 개인과 국가, 공동체의 안녕을 기원하는 종교적 발원행위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사실상의 공무원 신분인 '국가신사'의 제관들도 국가와 개인, 공동체를 위한 종교적 제례의식을 집행한다는 점이다. 둘째, 이 국가신도의 정점이 되는 '천황'의 권위가 '현인신'의 위치에서 신성을 부여받고 다른 어떤 종교의 '신'보다도 상위 위치에서 절대적 추앙을 받아야하는 구조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종교성을 여실히 나타내 주는 것이다. 서정민, <한국교회의 역사> , 살림출판사, 44쪽 참고) 그리고 전시체제의 확립과 더불어 종교보국이 강요되었다. 즉 전시체제가 되면서 전쟁 지원을 위한 종교계 차원의 노력이 강요된 것이다. 쇠붙이는 모조리 공출되던 체제 속에서 교회도 예외는 아니었다. 교회의 종을 공출한다는 것은 하나의 대표적 상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교회의 종을 가지고 총탄을 만든다는 상황이 만드는 것이다. 또한 애국기 헌납을 위한 헌금 모금운동도 대표적 사례다. 그 외에 비인간적 학살 등도 행해졌다.

2. 천황제 이데올로기와 신사참배 문제

기독교역사 안에는 국가와 교회 사이의 갈등이 있어왔다. 서구 교회사는 교회권과 세속권력의 갈등의 역사라고 볼 수도 있다. 일제 말기의 상황도 일본이라는 국가 권력이 한국 기독교라는 종교적 권위를 탄압한 것으로 해석해왔던 것이 사실이다. 정교갈등으로 본 것이다. 그런데 보다 자세하게 살펴본다면 국가권력에 의한 탄압이 아니라 종교권력에 의한 종교 탄압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천황제 이데올로기는 정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종교 이데올로기였기 때문이다. 당시 천황은 “현인신”이었다. 즉, 살아있는 인간이며 신이라는 것이다. 지금은 상징 천황제로 명시되나 여전히 그 잔재는 남아있다. 주목할 만한 의식은 천황의 즉위식과 더불어 진행되는 대상제이다. 천황이 특별한 옷을 입고, 특별한 장소에서 즉위한 첫날 밤을 보내는 것이다. 즉 일본의 국조신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와 첫날밤을 치루는 것으로서 천황과 일본의 국조신이 결합하는 종교적 차원의 행사인 것이다. 일종의 종교적 체계가 엿보인다. 당시의 천황제 이데올로기는 국가신도의 핵심적 체계이며 종교의 핵심이었기 때문에 종교와 종교의 갈등은 불가피했다.

일제말기의 신사참배는 종교적 성격을 지닌 것이었는데, 여기에 기독교인들이 저항한 것은 당연한 논리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실상 마지막까지 신사참배를 반대한 기독교인들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그러나 신사참배에 대한 평가를 그리 단순화 시킬 수 있는 건 아니다. 무조건적인 정죄, 무조건적인 이해 등의 극단적인 평가는 지양해야 한다. 처음에 한국 기독교는 민족 저항의 이데올로기적 역할을 감당했었다. 보수적 신앙을 가졌다기 보다는 사회 참여 운동으로서의 진보적 사상 운동의 경향성을 보였다는 것이다. 신학적 성향으로는 진보적이었다. 1919년 이전까지의 민족운동 주체는 진보적 성향을 가진 이들이었다. 1920년대에서 30년대의 민족운동, 계몽운동의 주체 역시 진보적 성향을 가진 이들이었다. 다만 방법론의 차별성을 가져왔을 뿐이었다. 그런데 1930년대 이후의 민족말살정책이 진행되면서 양상이 바뀌었다. 대부분의 진보적 성향의 운동가들은 친일로 전향했다. 대신 오히려 신앙운동이 민족운동의 양상으로 전환되었다.

주기철의 경우를 보자. 주기철의 죄목은 악질민족주의자였다. 주기철은 사실 신앙논리에만 철저했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일제가 보기에는 민족논리에 철저한 인물로 보였던 것이다. 현상적 민족운동이다. 내면은 신앙운동이지만 현상은 민족운동이었던 것이다. 국내의 민족운동 노선이 모두 무너졌을 때, 끝까지 남아있었던 민족운동은 완고한 보수적 신앙인들과 완고한 사회주의자들이었다. 이 사람들이 결국 교교갈등의 주인공이었다고 볼 수 있다. 더구나 기독교의 경우는 사상적 차원이 아니라 종교적 차원, 영혼적 차원의 저항이었다. 이는 육체적, 사상적 차원을 뛰어넘은 가장 고차원적이고 강력한 차원의 저항이다. 저항의 강도에서 가장 강력한 강도를 가진 것이었다. 죽여도 안되는 차원이기 때문이다. 순교자가 바로 이에 해당한다. 순교는 사상, 정신의 차원만으로는 쉽지 않은 것이다. 혹독한 고문에도 영혼의 차원, 종교적 차원은 굴하지 않고 오히려 강력해지는 것이다. 사상으로 견디는 사람은 지사적이고 명분이 중요하다. 그래서 변증에 능하다. 그러나 영혼으로 견디는 신앙인들은 변증이 별로 없다. 그들의 일기에서 보이는 내용은 “오늘 하루만 견디게 해달라”는 내용이었다. 거창한 차원의 내용을 담은 기도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이 버텼다. 실존 안에서 유약한 한 인간이 자신의 실존을 다 걸고, 시간 시간, 순간 순간을 버틴 것이다. 쑥갓을 먹고 싶고, 쌀밥 한 숟가락 먹고 싶다는 주기철 목사의 고백은 쉽게 지나칠 수 없는 내용이다.

3. 한국기독교의 굴욕과 변절

소수자들의 저항과 순교가 있었지만 대부분의 한국교회는 변절을 선택했다. 공교회 조직은 부일 협력을 했다. 총회에서는 신사참배와 전쟁지원을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일부 교단이 해산되기도 했지만,대다수 기독교 지도자들도 이러한 흐름에 부응했다. 부여에 있는 신사의 경우는 목사들을 동원하여 신사를 짓기도 했다. 신도에서는 세정의식이 있는데, 기독교인들을 데려다가 한강에서 그 의식을 치르기도 했다. 예배당에 들어오기 전에 신사참배를 해야 했으며, 성서강독권도 박탈했다. 묵시록들, 구약의 역사서, 예언서, 서신서들을 차례로 빼 내면서 결국에는 사복음서만 남겼다. 찬송가 금지목록이 나왔다. 그리고 예수와 천황을 직접 비교하며 양자택일을 하게 했다. 또한 세상의 종말에 일본 제국도 심판을 받는가의 질문도 받았다. 기독교 교리에 있는 원죄에 대해서 천황도 원죄가 있는가의 질문도 있었다. 천황제와 기독교 사이의 양자택일의 선택을 강요하는 것은 교교갈등의 면모를 보여주는 내용이다. 국가권력이 종교를 탄압할 때는 통상 종교적 이유를 대지 않는다. 그러나 교교갈등일 때는 가능하다. 종교적 권위와 종교적 권위가 맞부닥치기 때문이다. 이 권위 앞에서 기독교는 종교적 변절을 했다. 이단과 다름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국 기독교의 굴욕과 변절은 역사적 실존임을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인간의 유약함을 여지없이 보여주는 것이다. 결국 한국기독교는 총독부 문부성 관하의 하나의 조직으로서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으로 조직되기에 이르렀다.

4. 한국기독교인의 투쟁

물론 굴욕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소수의 저항과 투쟁이 있었다. 주기철 목사의 순교는 대표적 사례이다. 주기철 목사는 하루 하루, 순간 순간을 견디며 자신의 신앙을 지킨 자였다. 김교신의 성서조선 사건도 주목해야 한다. 무교회주의 계열의 소수파로서 김교신과 그 동지들은 조선민족의 희망을 성서조선에 비유로 이야기했다. “조와” (개구리의 죽음을 슬퍼함) 라는 글은 성서조선 관계자의 처벌에 결정적 빌미가 되었다. 그는 한국기독교 민족운동의 마지막 저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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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liards | 2009/06/22 17:26 | Lectures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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