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사]14강

강의: 서정민

기록: 김효성

1. 교회사에서의 신학사상사

신학사상사는 운동사 혹은 사건사 사이에 흐르는 사고의 흐름을 의미한다. 신학과 신앙은 다르다. 신앙이 '하나님을 향함'이라고 한다면 신학은 '하나님을 대함', 즉 하나님에 대한 사고이다. 신학은 하나님에 대해서 온정적 에토스를 가지고 사고할 수도 있고, 냉소적 반발심을 가지고 할 수도 있다. 어떠한 입장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학문적 성과가 다를 수밖에 없다. 교회사에서는 이러한 내재적인 역사, 곧 신앙사와 사상사도 현상적인 역사, 곧 운동사 혹은 사건사와 함께 다루어야 한다. 그러나 한국기독교 신학사는 빈약하다고 볼 수 있다. 역사가 짧고 대부분은 수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창출될 수 있는 신학사상사는 아직까지는 초보적 단계이며, 비주체적 단계라고도 볼 수 있다. 물론 신앙의 전승에서는 사도적 전승이 중요하다. 그러나 신학은 신앙과 다르다. 그러한 면에서 한국교회의 신학적 수준은 외래적 신학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신학 없음의 신학' 수준에 불과할 수도 있다. 신학사상사를 위해서는 흩어져있는 단편적 편린의 사료보다는 고백적 사료가 필요하다. 표피적 사료만으로는 내면의 깊이를 살피기에 부족하다. 신문보도 자료로 신학사상사를 다룰 수는 없을 것이다. 결국 내면이 올곧게 드러나 있는 사료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사료가 그리 쉽게 발견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한국 신학사상사에 놓여진 하나의 과제다.

2. 선교사들의 신학

한국신학사상에 큰 영향을 미친 것 중의 하나는 선교사들의 신학이다. 쉽게 선교사들의 신학적 배경을 복음주의 신학으로 말하기도 한다. 물론 선교사들의 신학적 사조의 배경이 복음주의 신학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여러 상황이 있다. 그러나 신학적 사조를 그렇게 절대화해서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 사실 복음주의 신학은 모든 신학적 스펙트럼을 포괄한다. 보수 복음주의에서 볼 때는 민중신학을 복음주의라고 보지 않겠지만, 큰 틀에서는 민중신학도 복음주의에 입각해 있다. 복음에 대한 해석의 문제라는 것이다. 따라서 절대적 개념 접근이 아니라, 상대적 개념으로 이해해야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문제를 염두하면서 한국신학사를 이해하고자 할 때, 선교사들의 복음주의적 신학 배경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미국 신학 사상사의 맥락을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미국 신학 사상사는 유럽의 신학 사상사와는 또 다른 면을 가지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미국의 신학은 미국적 상황에서 형성된 것이라는 점을 유념하자. 어떠한 상황? 당시 미국에는 여러 복합적인 상황 속에서 신학과 제도가 신앙을 공격할 때 대각성운동이 일어났으며, 이 운동의 한 지류로써 학생자원운동이 등장했다. 이 운동이 한국교회사와 밀접하게 연관을 맺는 이유는 이 운동이 미국 밖으로 선교를 하는 방식을 통해 표출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미국의 상황 속에서 산출된 교회사적 공헌으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정교분리"이다. 헌법에 신앙과 양심의 자유가 처음으로 보장되었는데, 이러한 영향 아래에서 선교사들이 국내로 들어왔다. 언더우드, 아펜젤러 모두 예외가 아니다. 그러나 미국교회의 전통이 그대로 한국적 상황에 적용될 수는 없었다.

3. 한국에서의 ‘자유주의 신학’의 개념

한국에 복음주의가 들어왔다. 포괄적이고 상대적 개념으로 이해한 복음주의 신학의 내용 중에서 보수적 복음주의가 들어왔다. 따라서 한국은 그 시작에서 다소 좁은 폭을 가지고 있다.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복음주의 신학이 주류 신학이 된 것이다. 1920년대에 확립된 소위 근본주의 신학이 주류로 자리잡았다. 축자영감설, 성서무오설은 그러한 입장을 드러낸다. 이런 상황 속에서 자유주의 신학 논쟁이 펼쳐졌다. 여기서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필요한데, 일반적인 의미의 자유주의 신학은 ‘이신론’에 입각한 신학으로서, 1920년대 미국, 독일 등의 나라를 휩쓸고 들어갔다. 이 때 자유주의와 전면 대결 했던 신학이 신정통주의 신학이었다. 신정통주의는 방법은 새롭게 그러나 목표는 정통주의의 노선을 따르는 것으로서, 성서에 대한 고등비평을 수용했다. 칼 바르트는 그 대표적 신학자이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이런 신정통주의를 자유주의 신학으로 몰아쳤다. 주류 신학의 보수 근본주의적 신앙 양태를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 정도로 보수신앙의 전승이 강했다.

4. 최초의 한국기독교 신학적 사건들

이런 배경 속에서 신학적 사건이 일어났다. 김영주의 창세기 모세 저작 부인 사건, 김춘배의 여권 문제(여성과 관련된 성서 해석의 문제였다), 김재준 등의 ‘아빙돈 단권주석’ 사건(미국의 출판사에서 나온 성서주석을 번역한 것이 양식비평을 사용했다는 이유로 생겨난 사건), 신학문제를 기준으로 한 ‘기장파’의 분열 등이 그것이다.

5. 한국의 창출신학과 신학논쟁들

1960년대부터 한국에서 독자적인 신학을 창출하고자 하는 노력이 시작되었다. 신학은 논쟁적일 필요가 있다. 토론과 논의, 논쟁을 통해 폭 깊은 신학적 사유를 이끌어 낼 수 있다. 신학적 논쟁에 대해서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하나의 신학 텍스트는 굉장한 영향력을 갖는 하나의 생산품일 수 있다. 한국 역시 마찬가지인데, 토착화 신학 논쟁이 일어났고, 그 결과로서 토착화 신학, 민중 신학이 창출되었다. 이러한 신학적인 결과물들은 기독교에만 영향을 주진 않으며, 한국 사회에 일정부분 기여했다. 물론 토착화신학, 민중신학에 이의가 없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 신학이 토착화 신학이 아닌 적이 없었고(명성교회의 새벽기도는 토착화의 전형을 보여준다), 민중 신학의 신학적 체계로 풀어낼 수 없는 문제들도 많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토착화 신학을 말할 때 그 방법과 기술을 서구적 틀에 맞춘 경향을 비판적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이러한 논쟁들과 그 논쟁들 속에서 창출된 신학 다음으로 에큐메니즘 신학이 있다. 에큐메니컬은 하나로 합하는 것을 목적으로 갖지 않는다. 통일이 아니라 다름을 추구하는 것이다. 다른 것을 서로 인정하는 것이 에큐메니즘이다. 그래서 상대방의 단점이 아니라 상대방의 장점을 발견하는 것이다. 1%의 같음이라 할 지라도 그 같음을 존중하는 것이다. 단 1%에 불과하더라도 그 1%로부터 에큐메니즘이 시작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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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liards | 2009/06/26 17:39 | Lectures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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