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1월 07일
칼 라너 <익명의 그리스도교와 교회의 선교적 사명> Note
*<종교다원주의와 기독교 I>, 김승철 편저, 2001, 나단에 수록된 것을 노트함. 다수 수정한 부분이 있다.
이 글은 얼마 전부터 <익명의 그리스도교>라고 불려지는 것과 교회의 선교 수행 그 자체에 대해 다루는 것이 아니라 이 둘의 상호관계에 대해 살피려 한다는 것을 먼저 밝혀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소한 아주 간략하게나마 이 둘의 실재에 대해 언급해야 한다는 것은 자명하다. 그렇게 해야만, 이 글의 본격적인 주제인 양자의 상호관계를 논할 수 있을 것이다.
교회의 전체적인 선교가 교회의 권리이자 의무라 한다면 그리스도교인이 되어 가시적인 교회에 속하는 것이 모든 인간의 본래적인 의무라는 점이 함께 이해되어야 한다. 이 양자의 중요성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둘의 상호성은 강조되어야 한다. 교회의 전체적인 선교 때문에 익명의 그리스도교가 반박된다면, 이 반박 또한 마찬가지로 반박할 수 있다. 즉 역사적으로 표현할 수 있고, 명시적으로 인식될 수 있으며, 공동체적인 의미에서 교회에 속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이론의 여지 없이 모든 인간의 근본적인 소명이며 의무다. 따라서 익명의 그리스도교의 교리와 교회의 보편적인 선교 수행의 교리가 조화될 수 있다면 익명의 그리스도교의 교리가 어떻게 모든 인간의 의무에 대한 교리, 가시적인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과 조화를 이루는지를 파악해야 한다.
익명의 그리스도에 대해 논하려 할 때 이 주제가 두 개의 다른 문제가 내포되어 있다는 점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우선은 용어의 적합성(Angemessenheit)과 임의성(Opportunta"t)에 대한 문제를 가능한 공시적인 관점에서 살펴봐야하며, 이러한 용어로 기술하고자 하는 상황이 적절하게 묘사하고 있는가 라는 문제와는 별도로 이러한 용어가 상황 자체를 어떻게 서술하고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용어에 관한 언어 선택의 적절성에 대한 문제에 있어서는 우선 익명의 그리스도(anonymer Christ)라는 개념과 익명의 그리스도교(anonymes Christentum)이라는 개념을 구분해야 하는가라는 문제에 부딪친다. 이를테면 앙리 드 뤼박과 같은 저명한 신학자는 익명의 그리스도교라는 개념을 거부한다. 그러나 그는 익명의 그리스도와 대립하는 어떠한 것도 갖고 있지 않다. 이 부차적인 문제를 우선 해결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사실을 언급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독일어에서 Christentum이라는 말은 최소한 두 가지의 뜻을 가진다. Christentum이란 단순히 실제 그리스도교인들의 총체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익명의 그리스도교인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이는, 마찬가지의 의미로 익명의 그리스도교가 존재한다는 것에 대해 반박할 수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라는 말을 '누군가를 그리스도교인으로 만드는 것'이라 이해한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본질적인 의미에 있어서 그리스도교에 속한다는 것은 그리스도교적으로 표현된 인식에 있어서 그리스도교를 역사적으로 명료하게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공동체적인 관점에서는 세례, 교회에 속하게끔 만드는 어떤 다른 방법을 통해 교회의 소속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가시적인 교회의 일원이 되는 것이 그리스도교의 본질에 속한다면, 다시 말해 사전적인의미에서 누군가를 그리스도교인으로 만드는 것을 그리스도교의 본질이라 한다면 <익명의 그리스도교>란 있을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익명(anonym)"이란 말을 사용할 경우 그리스도교의 본질에 속한 것으로서 역사적, 공동체적 현상은 제외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교라는 개념를 후자의 의미아래 토론을 전개할 때는 익명의 그리스도교인이라는 개념 역시 필연적으로 거부될 수 밖에 없다. '익명의 그리스도교인'이라는 개념 역시 마찬가지의 이유에서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용어의 임의성에 관한 물음에 있어서 '익명의 그리스도교인'과 '익명의 그리스도교'의 개념간 구분은 사소한 것으로 접어둘 수 있으며, 실질적으로는 이 두 개념을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두 개념을 모두 거부해야한다는 것을 전제할 수 있다. 물론 이 두 개념은 어떠한 난점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사전적인 의미에서 '그리스도교'라는 말에는 내적인 신앙의식과 그리스도교에 대한 명시적인 인식 그리고 교회에 대한 공동체성이 포함되어 있으며, 이것들은 "익명"이라는 말을 거치면 다시금 지양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의혹은 확실히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이 말을 거부하기 전에 몇 가지를 살필 필요가 있다.
"익명"이라는 말을 살피면 그 말 자체는 특별한 오해없이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말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 말을 사용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여기서 사용하는 '익명'이라는 말은 '어떤 대상을 가리킬 때 그것이 정확히 특정한 대상을 지칭하기보다는 그 대상의 본질이 반영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 익명이란 어떤 것이 '존재하는 것'은 그 본질이 내재한다는 것이 분명히 표현되지 않은 채 받아들여진다는 것을 말한다. 위와 같은 의미에서 '익명성'을 이해하고자 할 때는 익명으로 존재하는 것의 반성적인 자기 지속성(Zusichgekommerssein)과 익명으로 존재하는 것의 본질에 대한 반성(Wesensreflexion), 어떤 대상과 구별되는 이름을 통한 받아들여짐(Anerkennung)등의 존재여부가 문제시된다. 이러한 문제가 본질의 현실성 때문에 한결같을 수 없다면 위와 같이 이해된 '익명성'은 분명해질 수 있으며, "익명"이라는 말을 통해 표현될 수 있다. "익명"이라는 말은 바로 그러한 의미로 사용될 수 있는데, 이러한 차원에서 '익명성'이란 상태는 어떤 의미에서는 비존재적인 본질의 역이 되는 상태라 말할 수 있다. 어떤 대상에 대해 부가적으로 주어진 본질은 그것의 무명성(Namenlosigkeit)이 극복될 때만 밝혀지기 때문이다. "익명"이라는 말이 역설을 내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한다면 <익명의 그리스도교>라는 개념에 대한 반박을 더 거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익명의 그리스도교>라는 말은 다음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즉 소여성을 주장하는 그리스도교에는 완전한 본질규정은 결여되어 있다. 무엇을 가져야 하며 그 참된 본질은 어디에 감추어져 있냐는 본질규정이 빠져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고의 전제는 다음과 같은 사실에 근거한다. 즉 <그리스도교>라는 말은 복합적인 현실성을 가리키고 있는데 이 현실 가운데는 모두 똑같이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똑같이 거부해야 할 매우 다양하고 서로 다른 요인들을 함께 지니고 있다. 그러한 상황은 후에 상세하게 거론해야겠지만 (그러한 이질적인 요인들을 가리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교>라는 말을 아무 거리낌없이 사용한다는 것을 전제하면 <익명의 그리스도교>라는 말을 사용한다고 해서 크게 문제되지는 않을 것이다. <익명의 그리스도교>는 바로 다음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즉 훌륭한 수식어를 동원해 <그리스도교>라는 말을 아무리 잘 설명한다 하더라도 여전히 그것의 본질은 완전히 드러난 것이 아니며 또 역사적, 공동체적으로 표현되고 파악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용어의 문제와 관련해 두 가지 더 말할 것이 있다. 첫째, 이의적인 개념은 항상 어떤 난점과 모호성을 지닌다는 점이다. 심오한 경험을 표현할 때는 자료가 축적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현상의 복합적인 특성 때문에 모호하게 표현된 개념이 갖는 이의성과 오해의 가능성을 극복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특정한 개념으로 복합적인 현상을 짧게 줄여 표현할 수는 있지만 이러한 개념을 사용할 때는 현상의 다른 측면, 개념화의 과정 속에서 사소하게 취급할 수 없는 현상의 다른 측면은 누락된다. 원죄, 타율적 덕성등은 바로 그러한 대표적인 개념들이다. 이와 같은 개념들에 있어서 형용사는 명사가 표명하는 개념에 대한 부가적인 규정일 뿐 아니라, 개념을 한정시켜 준다(원초적인 죄를 가리키는 '원죄'는 개인적인 죄를 지칭하는 죄와 같은 것이 아니다. 또한 '타율적 덕성'은 '자율적 덕성'과는 다른 것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익명의 그리스도교>에서 의미하는 그리스도교가 가시적인 교회의 의미를 담은 그리스도교가 의미하는 그리스도교와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 아니며, 동일한 것도 아리나면, 그것은 일종의 또 다른 언어모형이 된다. 종종 확고한 모습을 지닌 언어 모형이 나타나기는 하지만 그것이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은 아니며, 그것이 가리키는 바가 용어에 좌우되는 것도 아니다. 이러한 상황(<익명의 그리스도교>가 가리키는 상황)을 보다 분명하게 진술할 수 있는 짧고 함축된 말을 찾을 수 있는 이, 그리고 그 개념이 하나의 긴 사고 과정의 요약으로 간주하고 처리할 수 있는이라면 이 용어는 포기해도 좋다.
문제의 초점으로 돌아오면, 우리의 관심은 <익명의 그리스도교> 혹은 <익명의 그리스도교인>이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있다. 그것은 교의에 의하면, 한 인간이 가시적인 그리스도교의 신앙고백을 받아들이기 전에, 세례를 받기 이전에도 성화케 하는 은총을 소유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는 의롭게도 되며, 성화도 된다. 다시 말해 그는 하느님의 자녀, 하느님의 상속자로서 초자연적인 영원한 구원의 은총을 입기에 합당한 이가 될 수 있다. <익명의 그리스도교>는 무엇보다도 세례 이전 하느님의 약속된 내적 은총을 말한다. 이 개념은 그 진정한 본질에 있어 '어떠한 인간을 세례 이전에도 의롭다고 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를 함축한다. 이 문제는 여전히 미결로 남아 있다. 예를 들어 견신례의 준비 교육을 받고 있는 이, 혹은 히브리서 11장 6절과 상응하는-도덕 질서의 보증으로서 신적 존재를 믿는 사람이 하느님의 은총을 입지 않고는 하느님의 명시적인 용납에 도달할 수 없는 이를 말하는지 하는 문제가 그렇다. <익명의 그리스도교>에 대한 외형적인 개념에는 이러한 구별이 없다. 현실적으로 그리스도교와 교회의 공적 계시의 말씀 사이에서 역사적이며 명시적인 개념의 관련이 없는 곳에서도 의인의 은총은 주어질 수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표명한 바와 같이 개념적인 반성의 차원과 문장으로 표현된 규정의 차원에서 하느님은 발견되지 않는다. 이러한 차원에서 한 사람이 무신론자로 간주되더라도 인의의 은총이 주어진다라는 전제를 해놓아야 <익명의 그리스도교>는 의미가 있다. 가장 발전된 의미에서 <익명의 그리스도교>는 가시적인 그리스도교 밖에서도 의인의 은총이 주어질 수 있음을 말한다. 따라서 최소한 성인이 된 이에게 있어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주체적인 삶을 영위할 책임 이외의 다른 한계를 갖지 않는다. 물론 그 책임은 그가 전 생애 과정 속에서 가시적인 그리스도교에 소속되지 않았다는 것 만으로는 입증되지 않을 것이다. 이와 같은 가설을 여기에서 충분히 다룰 수는 없다.
이러한 인식은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그것은 아마도 신약성서 속의 지식에서 시작된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신약성서에 따르면 하느님은 경우에 따라서는 세례 이전에 자신의 영을 내려 주신다. 세례를 받기 이전에 죽은 이 역시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암브로시우스의 교리, 세례의 서약만으로도 세례 성례 이전 인의가 가능하다고 말한 중세의 세례서약교리,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승인된 교리등도 그러하다.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 도덕주의자들 사이에 일어난 논쟁, 즉 어떤 교리상의 진리를 간접적인 필연성 속에서 의롭다 칭함을 받을 수 있기 위해 믿어야 하는 문제로 완화되고, 대략적으로 해결을 보았던 논재, 거룩한 의무에 관한 교리 즉 인의를 받기 위해서는 암시적인 교회의 서약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교리, 강단 전통에 대한 명백한 반대입장을 취하는 무신론자들이 무조건 중한 죄인으로 취급할 것이 아니라 각자에게 개방되어 스스로의 양심을 명백히 따르지 않는 무신론자들만이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결정된 교리 등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교회의 선교수행은 어떠한가? 이러한 일은 신약성서의 증언에 따르면 원칙적으로 보편적이다. 즉 선교는 근본적으로 다음과 같은 의미에서 모든 인간을 부른다. (특정한 국민성, 문화, 다른 종교등의 이유로 인해) 처음부터 어떤 이가 교회의 선교 대상에서 제외되고, 그러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은총과 의무아래 있지 않다고 확고부동하게 설명할 수 있는 선천적인 원칙은 없다. 그러나 이러한 선교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이미하지 않는다. 하느님의 권리를 교회의 의무화로 보는 것이 모든 순간과 상황, 모든 이에게 항상 동일하게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교회는 그리스도교인이 되는 것이 모든 사람의 근본적인 의무라고 여긴다. 그러나 이 의무화는 상이한 현실의 차이, 즉 문제의 대상이 되는 사람과 그 사람이 처한 상황에 따라 적용의 차이가 있다. 이제 문제는 다음으로 넘어간다.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객관적인 의무화는 복음이 선포된 이래, 즉 최초의 성령 강림 축제 이래 존속해 왔으며 이러한 의무화의 역사가 역사 속에 실현는 것을 깨닫는 인식의 역사를 의미하는가, 아니면 객관적인 의무화가 그것이 역사 속에서 실현되어가는 과정에서 모든 이의 의무가 되었는가라는 문제가 그것이다. 객관적인 의무와 역사적 과정 속에서 이루어지는 의무화, 권리, 역동성이 보편성을 띈다는 것은 자명하다. 그러나 그 과정은 결코 완성될 수 없다. 이 양자는 지금 서로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본래적인 주제로 돌아가 보자. 결정적이며 실질적으로 중요한 문제는 이 양자가 서로 조화될 수 있는지, 아니면 하나가 다른 하나를 지양시키냐는 것이다. 이 문제는 실제 교회의 보편적인 선교의지가 익명의 그리스도교의 가능성과 또 그것의 존재함을 논증하는 이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가와도 관련이 되어 있다. 물론 이 문제의 역도 역시 상반되는 논박을 받을 수 있다. 실제 선교를 한다는 것이 오늘날 익명의 그리스도교인에게 부여할 수 있는 조건으로, 선교의 선포가 지향하는 신앙의 설교에 대한 가능성이 주어져 있다는 전제 아래 달리 생각할 수 있는가?
이러한 문제에 대해 모든 측면에서 만족할만한 답변을 얻기 위해서는 선교, 선교의 본질, 선교의 근거에 대한 전체적인 신학이 요청된다. 하지만 이러한 신학은 이 글에서는 제시될 수 없을 뿐더러 전제될 수도 없다. 완전히 만족할 수 있는 것, 혹은 보편적인 것으로 받아들일만한 것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문제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은 특정한 유보 아래서만 말하고, 또 듣는 것임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무엇보다 먼저 이야기되어야 할 것은 선교의 선포가 선교를 가능케 하며 특정한 성과에 대한 희망을 갖기 위해서는 <익명의 그리스도교> 혹은 다른 것으로 명명할 수 있는 것을 전제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을 정확히 이해한다면 선교의 선포란(최소한 타율적으로 주어진 것으로서)신앙의 은총을 전제해야만 가능하다. 선포된 하느님의 말씀을 인간은 신앙의 은총으로만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물론 이런저런 지적이나 감정적인 방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신앙의 은총이 하느님에 의해서 주어진 어떠한 심리적인 도움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여기서 방해는 듣는 이의 개성, 그가 처한 문화적 상황, 자신의 개인적 내력의 특성 등으로 말미암아 어떠한 어려운 교훈을 이해하며 수용할 때 놓여있는 장애를 말한다. 신앙의 대상 그 자체는 하느님에 의한 초자연적 은총의 힘에 의해서만 이해될 수 있으며 또 받아들일 수 있다. 이러한 문제와 관련되고, 또 그 배후에 전통을 갖고 있는 토마스의 교설에 의하면, 은총은 존재하기는 하지만 인식할 수 없는 신앙의 행위로 말미암은 변화다. 토마스 사상과 수아레즈의 사상에 반대되는 몰리나 학파의 견해는 은총은 실제 의식할 수 있는 변화를 포함하며, 단순히 자연적 행위에 의해서는 도달할 수 없는 이해의 지평 즉 특별한 초자연적 대상을 제공한다. 은총의 빛에 이해서만 복음의 빛을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다. 신앙의 은총은 신앙의 교설에 대한 전제다.
복음의 선포가 듣는 이들에게 퍼지는 순간 이 신앙의 은총이 주어진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기적적이며 거의 신화적인 관념이다. 복음의 선포가 듣는 이에게 전해지는 순간 신앙의 은총이 역사하고, 작용하며, 촉진된다면, 비록 신앙의 은총이 항상 주어졌고 그것이 초자연적인 성격을 띈다할지라도 인간에게 주어진 실존적인 것에 속한다. 마찬가지로 신앙의 은총이 현실적으로 작용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경험의 대상으로서 외부로부터 만나게 된다면, 그것은 인간 내면의 자연적, 정신적 능력에 상응한다고 볼 수 있다. 현실적으로 역사하는 은총이라는 개념은 소위 전통적으로 생각해오던 방식과 동일화시킬 수 없으며, 그러한 방식으로는 정확하게 논증될 수 없다. 그러나 이 개념은 교리적으로 위배되지 않으며 근본적으로는 토마스의 교설에 포함시킬 수 있다. 인의를 얻기 위한 행위는 전통적으로 일컬어지는 은총의 힘 안에서 일어난다고 볼 수 있다. 은총에 대하여 고전적이며 토마스적으로 이해하고자 할 때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즉 은총은 (타율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며, 토마스의 견해에 따르면 실존의 자유로운 구원의 획득에 논리적으로 선행하는 것으로서, 이러한 은총이 시간상 영속적으로 은총을 입은 실존적인 것에 주어졌다고 생각하는 어렵지 않다. 이런 논의에 공감한다면, 이론의 여지 없이 다음의 견해를 받아들일 수 있다. 즉 은총을 받을 때 신앙이 주어진다고 증언하는 복음의 선포자는 인의의 은총을 최소한 (타율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며, 그 은총은 자유 가운데 받아들이는 것으로 생각하는 이에게 향하며, 또 향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신앙의 은총 없이 신앙의 설교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선포를 듣지 않은 이)는 익명의 그리스도교인이다. 따라서 선교의 수행은 익명의 그리스도교와 조화될 수 있어야 한다. 신학적인 근거에서 이와 같은 선교의 수행은 익명의 그리스도교인을 복음적 사명의 잠재적인 청취자로 전제하기 때문이다.
익명의 그리스도교인이라는 개념 자체로부터도 선교의 수행과 그 개념의 조화와 관련성을 살펴볼 수도 있다. 비록 익명의 그리스도교가 가시적 그리스도교에 선행한다 할지라도, 익명의 그리스도교는 가시적인 그리스도교를 필요없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자체의 본질과 고유한 역동성 때문에 익명의 그리스도교는 '가시화'를 요구한다. 이것을 보다 분명하게 이해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가설이 제시될 필요가 있다.
구원의 경륜에 따라서 (구원을 포함한)창조를 은총의 징표가 되는 성례전적인 과정에 논리적으로, 시간적으로 선행한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성례전적인 행위 자체의 역동성은 은총의 성례전적인 가시성, 성례전적인 성육신을 요청하게 된다. 동시에 성례전적인 은총이 실질적으로 상징하는 것은 단순히 은총을 받았다는 것을 단순히 알리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은총의 원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보다 많은 설명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이 가설을 적절한 것으로 볼 수 없다고 한다면 오직 세례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바울의 인의사상을 근본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 앞서 언급했듯, 베드로는 고넬료가 세례를 받을 수 있으며 또한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가 성령을 받았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제시한 가설은 구속사에 대한 기본적인 가설, 그리스도의 은총은 그 자체로서 시간상 전체 구속사에 주어져 있으며, 그 현상은 그리스도 자신이신 역사적 원성체에서 제시되었고, 그것을 통해 십자가에 달리고 부활하신 분의 종말론적인 섭리 가운데 시간의 완성이 성취된다는 교설을 개인의 구원에 적용한 것이다. 이 기본적인 가설은 성례신학의 많은 개별적인 교리들 가운데 제시되어 있다. 세례에 있어 원래 신앙,소망,사랑 즉 인의됨이 함께 있어야 한다. 불완전한 참회 때문에 인의의 은총을 받지 못하는 이가 있다고 한다면, 성례는 그러한 이에게도 인의의 은총를 베풀 수 있다는 세평의 견해들 때문에 이 의미를 다시 본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토마스의 견해에 따르면 성례전적 은총은 인간을 실존적으로 불충분한 '참회'에서 '완전한 참회'로 만든다. 여기서 그의 행위는 곧바로 구원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가 부여받은 구원에 의해 의롭게 된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면 앞에서 언급한 것의 의미는 정확해진다.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의 신학에 있어서 충분한 참회자와 그에 대한 아주 심각한 논쟁에 대해 우리는 충분히 숙고해봐야 한다. 신학적으로 불충분한 참회와 충분한 참회를 구분할 수는 없다. 실제에 있어서 이러한 구분은 특별한 의미를 갖지 않는다. 이러한 구분에 따르면 충분한 참회로 말미암아 죄에서 분명하게 떨어져 있는 이는 하느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또 자신의 실존의 목표로서 참된 사랑 가운데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것이 어렵지 않다. 그는 필연적으로 자유로운 의지에서 이룩한 자신의 실존의 목표를 성취해야 한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선행으로는 그러한 목표를 성취할 수 없다. 여기서 익명의 그리스도교인이 세례를 통해 가시적인 그리스도교인이 되는 것의 당위가 도출된다. (세례 받지 않은 이가)익명의 그리스도교인이 아닐 경우에 물론 합법적으로 세례를 받을 수는 있지만 의롭게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인의는 세례 그 자체에 선행하며 세례를 통해 교회 공동체의 가시성을 드러낸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성례가 은총의 원인이 되는가 아닌가 하는 논의는 불필요해진다. 성례는 여하튼 인의의 은총을 증가시킨다는 점을 확실히 말해야만 하고 또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그 은총은 성사를 받아들일 때 주체적인 행동을 실존적으로 심화시킴으로써 보다 증대시킬 수도 있다. 다음으로 확실하게 언급해야 할 것은 성례는 역동적인 은총의 역사적인 목적인으로서, 은총의 성육신의 참 상징이라는 것이다. 즉 상호의 공통적인 조건관계 속에서 성례는 근원적인 은총의 현실임과 동시에 원인이 될 수 있다. 이것은 교회성사에 대한 교리에 대한 검토를 통해 보다 분명하게 언급하고자 한다. 토마스 아퀴나스와 그 이전의 모든 신학(스코투스에 의해서 일련의 변화가 생긴다)에 의하면, 죄인들은 참회를 통해 다시금 의롭게 된 이로서 고해성사에 나아간다. 의롭게 된 채 고해성사에 나아가야 한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일반적인 경우 대부분의 이들은 고해성사를 구원의 필수적인 성사로 간주하는데 별다른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이들에게 성례는 필요불가결한 것이며 의미 있는 것이다. 성례의 문제에 있어서 인의가 성사 이전에 이미 이루어진다는 것에 대해 이들은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집단적이며 개별적인 구속사와 은총의 신학에 있어서도, 분명하게 역사적이며 교회적인 은총의 증거는 은총이 그것에 앞서 있다는 이유로 인해 무의미하게 되거나 무시되지 않는다. 이러한 은총은 은총의 진정한 본질 때문에 성육신의 질서 가운데 말씀과 무엇보다도 성례를 통해 역사적으로 구현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은총의 이와 같은 성육신의 역동성 자체를 근본적으로 부인하는 이에게서는 이러한 은총 자체가 부인된다. 모든 전통적인 신학에 있어서 은총과 성례의 관계에 대해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성례가 은총과 말씀에 대한 관계의 확대라는 점에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는 점이다. 복음의 말씀은 그 말씀이 들려지기 위하여 은총을 필요로 하며, 사람들이 개관적이며 반성적을 파악할 수 있는 차원에서 일종의 은총과 성육신으로 이해할 수 있고 또 이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은총이 삼위일체 하느님의 자기 양여(Selbstmittelung)로서, 그 본질에서 나와 로고스의 역사적인 성육신이 되며 따라서 언제 어디서나 그리스도의 은총이 내려질 수 있다면, 우리가 파악할 수 있는 신앙의 총체적 실재 역시 이러한 은총 속에 하느님의 자기 양여로 주어져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은총은, 은총의 고유한 본질로 인해서 전체적인 계시의 역사나 개별적인 신앙의 역사 속에서 신앙의 교리 그리고 파악할 수 있는 구원의 객관성을 드러낸다. 은총을 입은 이들에게 은총은 그들의 반성적인 자기 소유가 된다. 따라서 은총은 신앙의 선포 가운데 이해될 수 있도록 대상화되며 동시에 이러한 가능성의 조건으로 선행한다. 명시적인 신앙의 선포는 무시될 수 없다. 선포를 통해 주어진 은총은 이 선포의 조건과 내용보다 선행한다는 이유 때문에 그것이 선포될 것을 요구한다. 그것은 동시에 다른 이유도 있다. 즉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익명의 그리스도교는 가시적인 그리스도교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자체가 가시적인 그리스도교를 요구한다. 익명의 그리스도를 주어진 것으로 받은 이가 가시적인 그리스도교를 근본적으로 폐기시킨다면 익명의 그리스도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기껏해야 심판으로 주어질 뿐이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선교신학이 부분적으로 선교의 의미와 필연성을 새로이 해석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는 것은 정당하다. 이전 시대에는 많든 적든 간에, 분명하게 또 철저하게 선교의 필연성을 각 개인의 구원에 두었으며 또 그것을 통해 입증하려 했다. 선교는 필수적인 것이었다. 선교를 받지 못한 자는 잃어버린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에는 보편적인 하느님의 구원의지를 이해하기 위해 각 개인의 계몽에 대한 이론이나 그 이후 시대에 전달된 원계시 같은 것으로 이해된 이론을 갖고 있었다. 거기에 특정한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인의를 위한 필수적인 전제로서 초자연적 계시에 대한 고유한 신앙과 같은 이론도 갖고 있었다. 과거에도 초자연적 계시는 기본적으로 그리스도교의 가시적인 사명 밖에서도 가능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이 실제로 주어진 것이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이러한 것을 구원의 원리와 관련해, 혹은 자연적인 도덕률에 대한 파괴의 보편성과 관련해 하느님의 보편적인 구원의 의지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로부터 주어진 초자연적인 신앙의 은총에 대한 거부를 정당화시키는 파괴의 보편성과 관련해 설명했다. 그러한 관념을 정확하게 평가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근세 이전 유럽 신학이 그리스도교를 믿지 않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또 얼마나 긴 역사를 지니고 있는지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갖지 못했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전통적인 선교신학이 전제하고 있는 기본적인 이념은 검토되어야 한다. 즉 선교는 단순히 잃어버린 자로 생각되었던 이들에 대한 개별적인 구원을 목표로 하며, 개인적으로 주어진다고 생각하는 신앙의 은총에 대한 거부에 선행한다. 오늘날 우리는 비그리스도교적인 인류의 역사가 폭넓고 오랜 역사를 가졌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으며,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권능을 존중한다고 해서 인류의 대부분이 잃어버린 자라는 전제를 더 이상 할 수 없다. 이와 같은 생각은 (타율적으로) 주어지는 신앙의 은총에 대한 부정 즉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의 부정이 아니라, 다른 차원에서의 부정이다. 오늘날 복음의 명시적인 선포에 정면으로 대립하는 이가 아니라면, 누구라도 진정한 신앙의 결단 앞에 설 수 있다. 신앙을 통해 의로움을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을 신학적으로 보다 분명하고 보다 분별력 있게 사유할 수 있고 초자연적 은총 속에서 비그리스도교적인 이들을 포함한 모든 이에게 진정한 인의의 가능성이 주어지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으며 또 그렇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교회의 선교의 의미와 필연성은 특정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복음에 대한 선포와 세례를 받지 못한 잃어버린 자들에 대한 개별적인 구원에 있는 것으로 더 이상 돌릴 수 없다.
(익명의 그리스도교와 연관지어)선교에 대한 적극적인 의미 부여가 가능하다는 요지는 이미 거론했다. 모든 이의 구원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역사하시는 하느님의 은총은 하나의 성육신적인 특성을 갖고 있으며 그 자체는 인간 실존의 모든 차원에서, 인간 실존의 역사와 공동체 속에서 구현되고 표현된다. 또한 그것은 인간 자체의 본질 때문에 교회를 형성하게 한다. 선교와 선교사는 은총의 이와 같은 성육신적인 역동성에 힘입어 이야기해야 한다. 간략한 윤곽만 제시한 선교 신학은 성서에 의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제정된 선교 규정등에 의해 보충되고 심화되고 있다. 선교는 개인적인 구원의 관심 속에서 각 개인에게만 향하는 것이 아니라 민족과 문화에로도 향한다. 선교는 모든 민족을 향한 파송이며, 구속사적 과제를 갖는다. 선교는 모든 민족들 가운데, 그들의 역사와 문화 속에 그리스도의 복음과 은총이 임재하게 하며 따라서 그리스도를 세계 내에 새롭게 성육하신 분으로 믿게 한다. 이러한 선교를 통해 그리스도교는 추상적이며 유아적으로 사유된 각 개인의 초월적인 구원에 대해 확실하게 말할 뿐 아니라 현실 속에서 하느님의 은총이 모든 가능성 속에서, 역사의 모든 역사의 공간과 상황 속에서 드러나도록 해야할 것이다. 세속적인 세계로부터 비밀리에 몇몇 이들이 구원되어 가는 저 세상만 하느님과 그리스도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 역시 하느님께 속해있다. 이 편에서 있는 역사와 민족들 역시 마찬가지다. 인류가 이룩해 나아가는 역사는 수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속해있으며 그 속에서 전개되어 간다.
이러한 선교신학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이루어졌다고 해서 선교가 각 개인의 개별적인 구원을 도외시해야한다고는 주장할 수 없다. 선교의 근원적인 가능성과 현실적으로 단지 각 개인의 개별적인 책임 여하에 따라 주어질 수 있는 구원의 기회가 항상 모든 이에게, 즉 명시적인 복음의 선포 밖에 있는 모든 이에게 주어져 있다는 주장이 구원의 상황과 구원의 기회가 항상 동일하게 주어지는 것이며, 각 개인들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동일한 강도로 주어진다는 식으로 이해되어져서도 안된다. 신약성서의 증언을 따라 구원의 상황을 극단화시키는 것이 어떠한 측면에서는 오히려 위험하게 된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각자의 구원의 상황과 구원의 기회는 각 개인을에 따라 수정되어야 하는 것이 자명하다. 인간의 실존에 대한 객관적 반성은 설사 이것이 근본적으로 무반성적으로 자유 가운데 실행될 수 있는 것일지라도, 이 자유로운 성취와, 그 성취의 실존적인 철저함은 아무런 강제성 없이 필연적으로 이루어지며 그것이 조성된다는 점은 보편적으로 인정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모든 형이상학적 인간학은 아무런 실존적인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되며, 그저 사소한 신학적인 호기심에 지나지 않게 된다. 인간은 자신의 인간됨을 무감각하게 무반성적으로 이해하는 이로 간주하기보다는 보다는 스스로가 어떤 존재이며, 자유 가운데에서 행동하는 존재라고 간주해보자. 반성적으로 사유함으로써 스스로에 대해 알 때에 인간은 그 자신을 자기 완성에로 이끄는 데 성공하게 되며, 그만큼 보다 넓은 섭리의 지평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증진하게 될 것이다. 익명의 그리스도교에 속해 있다 선교의 선포를 통해 반성적으로 이룩하게 되는 자기 귀속은 한편으로는 일종의 철저한 변화이며, 한편으로는 보다 넓은 차원으로의 이행을 의미한다. 은총을 통해 주어지게 되는 이와 같은 그리스도교는 엄격한 자유 속에서 완전한 성취 속에서 명시적인 그리스도교로 나아가게 되는 보다 큰 기회를 의미한다. 명시적인 그리스도교가 익명의 그리스도교 보다 구원의 기회가 더욱 크기는 하지만 유일하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해서 선교의 열의가 식어야 한다고 누구도 말할 수 없다. (타율적인) 제공 없이 자유로운 자기 성취의 근원적인 기회는 항상 주어지는 것일지라도, 삶 전체를 통해 자유로운 자기성취의 보다 넓은 지평을 제공하는 것은 선교의 의무가 될 수 있다. 어떠한 부모도 자신의 자녀에게 가능한 한 유리한 인생의 출발점을 만들어주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자녀들은 이미 최소한의 삶은 보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부모는 자식에게 더 많은 것을 주기 위해 노력한다. 이와 같은 노력은 '사랑'이다. 이 '사랑'은 (그리스도교인에 있어)절대적인 의무다.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구현되는 선교도 이와 같다. 익명의 그리스도교는 선교신학에 있어서 각 개인의 개인적 구원을 위한 선교의 관계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 by | 2009/11/07 14:56 | Notes : Theology | 트랙백 | 덧글(0)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