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병현-The Deep Fog Series




사진을 위한 철학적 소고

“가끔씩 어떤 ‘순간들’을 만난다.
그 ‘순간들’은 아주 낯선 것들이고
그 ‘낯섦’은 아주 익숙한 것들이다."

- 기형도, ‘어느 푸른 저녁’의 시작메모, 『문학사상』, 1985년 12월호


깊은 안개 속에 자신을 감춘 듯 드러낸 나무의 실루엣이 시각에 포섭되는 ‘순간’, 인간의 인식은 그것을 낯선 모습으로 판단한다. 그 ‘낯섦’은 새로운 현상이나 사물을 대하는 순간들에 있어서 일어나는 인간의 즉각적이고 생리적인 반응이다. 하지만 그 순간의 ‘낯섦’은 곧바로 안개라는 현상과 나무라는 사물에 대한 인간의 인습적인 관념에 의해 정돈되거나 해체된다. 즉, 안개로 인해 제공된 순간의 ‘시각적 낯섦’이 곧 일상의 ‘관념적 익숙함’으로 대체되는 것이다.

순간들의 연속으로 구성되는 시간과 장면들의 연속으로 지각되는 공간은 언제나 절대불변의 법칙을 따라 인간의 삶을 구성하고 있는 틀처럼 보인다. 하지만 어떠한 흐름의 불연속선들이 접해지는 접점에서 인간의 시각은 시간과 공간의 순환 속에 찰나의 구멍을 뚫고 범상치 않은 ‘낯섦’을 발견할 때가 있다. 이 사진 속에서 안개는 그 ‘낯섦의 매개물’이다. 안개는 칸트가 설파한 인식의 선험적 형식인 시간과 공간의 외피에 찰나의 균열을 내고 인간 감각의 불연속선들을 끊임없이 자극한다.

따라서 안개 속에서, 시간과 공간은 절대불변의 법칙이 아니라 일종의 추상, 혹은 관념처럼 여겨진다. 또한, 사물들의 실루엣이 뭉개져 버리는 안개의 자궁 속에서 인간은 사물을 바라보는 낯선 방식을 발견하게 된다. 그 방식은 시각적 한계를 인식하게 하는 것이기 보다는 일종의 불연속적인 시각의 흐름 속에서 새로운 '보기'의 차원을 발견하게 한다.

그 새로운 가시성의 차원은 명석, 판명한 사물들에 대한 관념을 쫓아서 사물을 인식하는 방식이 아니다. 그것은 관념이 아닌, 어느 특정한 순간에 있어서 인간의 인식에게 요청되는 ‘판단 중지’를 출발점으로 삼는 '보기'이며, 안개라는 미디어를 통해 사물들을 새로운, 즉 낯선 형식으로 받아들이는 작업을 그 연장선상에 둔다. 이러한 '보기'와 그를 통해 받아들여진 '낯섦'의 근본 원인은 안개라는 매개물이 인식 주체와 인식 객체라는 역할의 혼란스러움과 인식에 있어서 능동성과 수동성의 사이의 혼란스러움을 야기한다는 사실에 기초한다.

하지만 ‘낯섦’은 어느 특정한 순간(안개 속의 한순간)을 그 생명력으로 삼을 뿐이다. 연속적인 순간들 속에서는 인간의 관념이 낯섦을 제거하고 자신의 기존 인식 틀을 방어하기 때문이다. 나무의 불변하는 형상이 안개 속에서도 고정되어 있다고 여기는 관념의 오만은 시각이라는 뒷문을 통해 인식의 성에 몰래 침입한 낯섦을 몰아내고 곧 감각이라는 종들을 모두 자신의 발 앞에 다시 사열시키는 독재자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 사진을 감상한다는 것은 순간들과 연속적인 순간들, 시간과 공간의 확실성과 불확실성, 능동적 인식과 수동적 인식사이에서 갈등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무의 모습을 교란시키는 안개와 관념이라는 두 가지의 매개물 속에서 나무의 본질적 실체에 도달할 수 없는 인간 인식의 한계를 본다는 것이기도 하다.

요약하자면, 이 사진을 볼 때,
안개는 ‘순간들의 낯섦’으로, 관념은 ‘낯섦의 익숙함’으로 감상자를 이끈다는 것이다.


"안개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처음 얼마 동안
보행의 경계심을 늦추는 법이 없지만, 곧 남들처럼
안개 속을 이리저리 뚫고 다닌다. 습관이란
참으로 편리한 것이다."

- 기형도, ‘안개’, 『입속의 검은 잎』(문학과 지성사, 1989)


posted by 다르샨 - The Third Eye

by 회색분자 | 2005/04/13 11:50 | 트랙백 | 덧글(0)

트랙백 주소 : http://goliards.egloos.com/tb/78349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

:         :

:

비공개 덧글

◀ 이전 페이지 다음 페이지 ▶